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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3.29 평행선에서 - 04
  2. 2015.03.29 평행선에서 - 02, 03

유흥가 초입부에는 으레 파출소와, 그 근처에 약국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한석율과 성준식 같이 술 마시고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들을 위한 자연스러운 배치였다. 한석율은 약국 문을 열었다. 약사는 취해서 이성을 잃은 남자들을 하도 많이 봐서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약을 내밀었다. 돈을 내며 흘끔흘끔 뒤돌아보니, 성준식은 이미 밴드와 약을 사서 정수기 옆에 걸린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붙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옷 매무새가 마치 쉬는 시간에 싸움박질을 하다가 끌려온 중학생마냥 가관이었다. 아마 자신의 꼴도 그럴 것 같았다. 이대로 내일 출근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둘이 한 판 붙었음을 모든 사람들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을 터였다. 

눈 가에 난 상처에 살색 밴드를 붙이던 준식은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을 냈다.

 

"아 씨... 이래가지고 내일 출근 어떻게 하냐고."

 

", 또 제가 사수 쳤다고 소문 내지 그래요?"

 

"이게 사람을 뭘로...."

 

준식은 화를 내다가 그들을 차갑게 보는 약사의 눈길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됐어. 여기서 더 말 만들면 나도 곤란해. 우리 둘이 술 마시다가 다른 팀이랑 시비 붙은 걸로 하자."

 

대리님이랑 제가요? 말이 됩니까? 사이 안 좋은 거 다 아는 마당에.”

 

석율은 어이없다는 듯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꼭 그렇게 따지지. 뭐 하나 수월한 게 없어... 그러니까 내가.”

 

절 싫어한다고요?”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싫어하잖아.”

 

석율은 입가에 약을 바르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실소 때문에 비뚤어지는 입가를 숨기지 못한다.

 

그것도 맞고요.”

 

넌 날 사수라고 생각은 하냐?”

 

“......사수 같아야 사수라고 생각을 하지 말입니다.”

 

그래, 넌 날 항상 개떡으로 생각하잖아. 그러니까 손이 나오지, 이 새끼야.”

 

약을 삼키듯 쓰게 입 안으로 중얼거린다. 석율은 거울 속에 비친 그를 보았다. 그의 눈 아래 광대뼈 주변으로 푸른색 멍이 점점 번져 자주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좌우가 바뀐 작은 네모 틀 안에서 석율과 눈을 마주치며 잠깐 동안 말이 없었던 준식은 반창고 껍데기를 뭉쳐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건.....”

 

맞받아서 개떡같이 행동하니까 개떡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려던 입을 다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준식을 상처내는 데 집중했던 석율은, 점점 취기가 떨어짐에 따라 현실감각을 회복하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시선을 떨궜다. 지금까지는 어쨌든 최소한의 선은 지켰었는데 오늘 가정교육이며 소시오패스 운운에 그만 분노로 눈이 뒤집혀 하극상을 저지르고 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아무리 그래도 성준식은 연상이었고 선배였으며 사수였는데.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아 또다시 어제와 같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석율은 스스로의 감정에 반감을 가지듯 입술을 깨물었다. 

 

약국의 유리문을 여느라 팔에 힘을 주다가, 성준식은 자신도 모르게 낮게 신음했다. 눈썹 사이를 찌푸리고 옆구리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서로가 같이 때리고 맞았지만, 비슷한 덩치라도 석율 쪽이 더 뼈대가 근골이었기 때문에 꽤 충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상태를 눈치챈 석율은 뒤에서 문을 밀어 열어 주었다. 몇 초간, 성준식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발을 내딛는다. 

석율은 신경질적으로 몇 번 눈을 깜빡거리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그의 뒤를 이어 다시 밤거리로 나섰다.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준식은 갑자기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 좀 따라와."

 

"누가 따라가요. 저도 지하철 타야 되는데."

 

이빨을 내보이며 일갈하고 나서, 석율이 말을 하고 있는 도중인데도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걷는다.

 

'아오 저 개새끼...'

 

석율은 울컥거리는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주먹을 꾸욱 쥐었다. 성준식이 꼴보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았다. 일할 때 기력을 소모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불필요한 마이너스 감정 때문에 몸과 마음이 널뛴다. 

 

역 앞까지 온 준식은 내려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석율을 부른다.

 

"야 한석율."

 

"왜 부르십니까."

 

석율은 몇 발짝 내려가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버릇처럼 표정을 읽으려고 집중한다. 내려다보며 눈을 마주하는 것은 잠시,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눈을 돌리고 입을 꾹 다문다. 숨을 고르며 가만히 섰던 그는 몸을 돌려 다시 거리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석율은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씁쓸했다. 저 사람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단 한 번도 그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지엽적으로 단어에만 집착하는 그의 벽에 부딪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의 말들은...? 석율은 그가 자신을 노려보며 반복적으로 말하던 몇 가지를 곱씹었다.

너는. 내가. . .

무시해. 개떡으로. 꼴 보기 싫어해.

 

 

한석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선 끄트머리에 멀리 남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계단을 올라가 그 쪽으로 서둘러 갔다. 

 

 

 

 

따라오는 거 맞잖아.”

 

소주를 앞에 놓고 포차에 앉았던 준식은 앞에 석율이 와서 앉는 것을 보고 허. 하고 짧게 비웃고는 따졌다. 석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을 뒤로 기댔다. 술을 마시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잔이 비자 손을 빼서 따라 준다. 주인아주머니가 잔과 메뉴를 새로 가져다 주었다. 성준식 역시 석율의 잔을 채워주었다. 

 

“.....성대리님.”

 

석율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아.... 왜 이렇게. 저는 그냥, 어제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뭐가.”

 

죄송해요, 찌질하다고 해서. , 물론 찌질하신 건 맞지만 말입니다.”

 

그게 사과냐?”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어요?”

 

이게 왜 또 시작이야.”

 

여자친구 많잖습니까. 남의 부인은 왜 만나요?”

 

이제 안 만난다고! 어제 봤잖아, 끝냈어.”

 

~그게 그럼. 어쩐지 아주 영화를 찍으시더라니.”

 

준식은 소리가 나도록 소줏잔을 세게 내려놓고 석율을 쏘아보았다.

 

죄송하다며. 그럼 그냥 죄송하다 하고 끝내, 이 새끼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아까 친 것도 죄송해요. 물론 성대리님도 절 쳤지만.”

 

~. 지겨운 새끼.”

 

준식은 끝까지 따지는 석율의 말에 헛웃음을 웃었다. 술맛 다 떨어진다며 석율을 노려본다. 

 

 

 

소주병이 하나 둘 늘어났다. 점점 인사불성이 되어가는 두 사람은 다시 언쟁하기 시작했다. 취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리고 말꼬리를 질질 늘어뜨리며 목을 쥐어짜서 소리를 친다.

 

그러니까아~ 한석율 너 때문이잖아!”

 

뭐가요~ 자기가 먼저 엿먹여놓고오!”

 

그때 네가, 남들 다 듣는 데 카드 한도 초과 됐다고 말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눈치껏 세잔 네 카드로 사서 카드 돌려주고, ? 아 어떻게 대리님 카드를 제가 씁니까~ 하고 넘어갔어야지! 애새끼가 유도리가 이렇게 없어? ?”

 

, 기가 막힌다. 그래요, 제가 센스가 없었습니다. 됐습니까? 예에?”

 

준식은 흐린 눈을 하고 석율의 얼굴에 삿대질을 했다.

 

이 한결같이 건방진 새끼야. 넌 원래 나 무시했어.”

 

원래 무시한 거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애초에 한도 초과된 카드는 왜 주냐고!”

 

아 몰랐어!”

 

뭘 샀길래 한도가 초과가 돼나?

 

.”

 

기가 막히네.....”

 

석율은 취해서 잔을 잡으려다가 헛손질을 하면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듯 했다. 원래 성준식은 섬유팀답게 좋은 패브릭에 집착했었다. 고성이 오고가다가 갑자기 웃다가 하는 그들의 테이블을 미심쩍게 보며 다가온 주인아주머니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혹시나 진상을 부릴까 싶어 석율을 옆눈으로 째려본다.

 

총각. 이제 그만 마셔.”

 

아니, 아줌마가 무슨 상관이야~”

 

못된 말투로 심술부리는 준식도 째려본다.

 

아저씨도 그만 마시고.”

 

아저씨 단어에 벙찐 준식의 얼굴을 보고 석율은 웃기 시작했다.

 

웃지 마 이 새끼야.

아줌마, 나 아직 아저씨 아니라고오. 어딜 봐서 내가!”

 

으악... 아저씨래~미치겠다

 

짜증을 한껏 내던 준식은 배를 잡고 웃는 석율을 보다가 웃는 꼴이 우스워서 같이 웃기 시작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꽐라가 된 채 미친 놈들처럼 웃어대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는 부추겨서 나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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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

성준식은 그 날 이후 처음으로 한석율과 눈을 마주쳤다.

 

“너 할 일 없는 거 맞아, 이 새끼야. 참견하지 마”

 

꽉 다문 잇 사이로 말을 한다. 이마에 주름을 잡고 눈을 치뜨며 있는 힘을 다해 노려보고는, 석율을 어깨로 밀치며 가려고 했다. 석율은 그의 팔을 잡았다.

 

“술값은 내고 가셔야죠, 성대리님. 또 저한테 빈대 붙으실 겁니까?”

 

성준식은 그의 말에 발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석율, 넌 처음부터 나 무시했어. 날 엿먹이려고 작정했다고.”

 

“그 얘기가 왜! 지금 나오냐고요, 예? 그리고, 대리님이야말로 저 이용했잖습니까. 전 최선을 다해서..!”

 

“최선 같은 소리하네. 넌...!”

 

엇갈리면서 전혀 상호작용이 되지 않는 대화는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조용히 듣고 있던 덩치 큰 바텐더가 굳은 얼굴로 바에서 나왔다. 정중한 말투에 은근하게 강요를 실어 나가 달라고 요청한다. 

석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는 성준식의 뒤를 따라갔다.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찌질한 새끼.”

 

그가 나지막하게 입 밖으로 내뱉는 말에, 성준식의 발이 멈췄다. 올라가다 말고 멈춰서는 바람에 석율은 그의 등에 코를 부딪혔다.

 

‘뭐야 시발...’

 

입 안으로 욕을 하던 석율은 그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옆으로 올라갔다. 옆얼굴을 쳐다본다. 석율의 시선을 느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석율과 시선을 마주쳤다. 화난 것도, 경멸하는 것도 아니고, 수치스러운 것도 아닌 찰나의 표정이 그의 눈을 스쳐 간다.

 

석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놀랍게도 상처를 받았다, 그 성준식이.

 

  

 

 *

다음 날 아침, 석율은 눈치를 보면서 출근했다. 성준식은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석율은 그가 신경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 보았던 그의 눈, 아주 잠시간 스쳐갔던 표정이 자신의 마음에도 흠집을 낸 듯 도저히 떨쳐지지가 않았다.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죄책감따위가 왜 필요한가를 고찰하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석율은 일을 하면서도 이따금 그를 뒤돌아보았다. 전화통화를 하는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자 준식의 얼굴이 굳는 것을 알았다. 

 

“성대리님.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성준식은 옆에 와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석율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짜증부터 냈다.

 

“얘 또 이러네. 왜?”

 

“잠시만요.”

 

석율은 그가 응낙하기도 전에 당연한 듯 말을 눌러서 하고는 뒤돌아서서 먼저 나갔다. 그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석율은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자신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온 성준식은 굳은 표정으로 아래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 볼 뿐,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탁한 도시의 공기가 올라와 시야가 뿌옇다. 한참 아래에서 울리는 차들의 경적 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지면서 은은하게 들려왔다. 도시의 소음 외에는 침묵만 흐르는 순간을 어떻게 깰지 모르는 채로, 석율은 안절부절했다. 성준식은 점점 짜증이 나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불렀으면 말을 해.”

 

“어제는...”

 

석율의 말에 마침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를 부득 갈면서 노려본다.

 

“그 일은 참견하지 말라고 했잖아. 넌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냐?”

 

듣지도 않으려는 태도에 석율도 짜증이 치솟았다. 어쩌면 변함없이 이렇게 의사소통이 안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정신입니까? 또 걸리면 진짜 징계인 거 몰라요?”

 

“그러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진짜. 그렇게 쳐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나?”

 

“이 새끼가...!!!”

 

멱살을 또다시 잡히고도, 석율은 비웃었다.

 

“거 멱살 잡는 거 되게 좋아하십니다.”

 

“건방진 새끼....”

 

성준식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붉어진 뺨 위로 노기를 띈 두 눈이 석율의 양 눈을 번갈아 본다. 거칠어진 그의 숨이 턱에 와 닿았다. 석율은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그가 손을 놓았다. 마른 침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움직인다. 잡혔던 옷자락을 당기고 탁탁 털어 매무새를 바로 하며, 여전히 그를 경멸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석율을 흐린 눈으로 마주보고 고개를 숙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찰나에 작은 틈이 드러난다. 뻔뻔하게 유지하는 성준식의 외형에 난 작은 금 사이로 회색빛의 무언가가 보였다. 석율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죄책감이라기엔 분노가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석율은 돌아서서 가려는 그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요.”

 

낮게 깔린 석율의 목소리에도, 성준식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팔을 힘주어 뿌리쳤다. 있는 힘껏 문을 쾅 열고 내려간다. 원래는 어제의 발언을 사과하려고 그를 부른 것이었는데, 좀처럼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았다. 혼자 남은 석율은 그가 열어 놓고 간 문을 멍하니 보았다. 

 

 

 

 

*

아무 변수가 없어 무난히 퇴근이 가능한 날이었다. 퇴근시간 30분 정도가 지날 무렵, 일을 마친 석율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뭔가를 기다렸다. 책상 아래로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성준식은 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본 석율 역시 과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성대리님.”

 

석율은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빨리 하며 재차 사과했다.

 

“죄송하다고요.”

 

“꺼져.”

 

“사람이 사과를 하면 좀... 아니. 제가 술 살께요. 술 한잔 하시죠.”

 

“약속 있어.”

 

“허... 그러고도 또 만나러 갑니까?”

 

성준식은 결국 화가 나서 석율을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작은 목소리로 석율에게 윽박지른다.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거 아니야! 참견하지 마, 이 지겨운 새끼야.”

 

“그럼 누구 만나는데요?”

 

“지겨운 새끼.”

 

석율에게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죄책감은 분노에 밀려 사라졌다. 그는 악의에 가득 찬 채로, 뻔뻔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두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건방지게 얼굴을 쳐든다.


“저도 같이 가시죠.”

 

입꼬리만 올려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의 말에 놀란 성준식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성준식은 걷다 말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한석율이 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바로 뒤에서 따라오다가, 눈이 마주치자 웃는다. 석율의 입은 웃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 안에 반감이 가득했다.

 

“....왜 따라와.”

 

“저도 같이 가려고.”

 

“뭘, 어딘지 알고 같이 간다는 거야?”

 

“우리 성대리님 불륜으로 짤리시면 전 누구한테 일 배웁니까, 예?”

 

석율은 빈정대는 자신의 말에 준식의 얼굴이 분노로 굳는 것을 보면서도 웃었다. 그는 현재 희한하리만치 악의적인 감정에 지배당해 있었다. 뻔뻔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람을 맘대로 이용하고 휘둘러대는 주제에 그 때 그 순간의 표정은 무엇인가 싶었다. 이런 인간에게 잠시나마 죄책감을 가진 자신이 제일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용의주도하게 상처 낸 만큼 그를 상처내고 싶었다.

준식은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석율의 새까맣고 큰 눈동자에 강한 감정이 어린 채 자신을 똑바로 쏘아본다. 한 발 뒤로 물러났던 그는 곧 맞서 눈을 치떴다.


“한석율, 그렇게 나 엿먹이고 싶냐?”

 

“이부장 남편한테 전화할까요? 번호 아는데”

 

“안 만나, 아무도 안 만나! 그러니까 꺼져.”

 

“그럼 저랑 얘기 좀 해요.”

 

“너랑 할 얘기 없어.”

 

석율은 발길을 돌려 가는 그를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점점 빨리 걷는 그를 똑같이 발걸음을 빨리 해 쫒아간다. 준식이 향한 곳은 어제와 같은 장소였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둘이 연이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바텐더는 그들을 알아보고 약간 얼굴을 굳혔지만 일단 내버려두었다. 

바 자리에 앉는 준식의 옆에 석율도 앉았다. 준식은 옆을 보지도 않고 술을 시킨다. 석율은 그와 같은 것을 온더락으로 시켰다. 그는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다음 잔을 시키면서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그제서야 옆을 노려본다. 지겹다는 듯 입을 연다.

 

“나랑 할 얘기가 뭔데.”

 

석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의 태도 때문에, 이미 어제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상처 입히고 싶기도 한 반면 상처 입히고 싶지 않기도 한 상반된 감정은 자신도 이해 못 할 것이었다. 어쨌든, 그가 아무도 만날 예정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조금 김이 빠진 석율은 자신의 온더락을 마셨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준식 역시 묵묵히 자신의 술을 마셨다. 이따금 쯧 하고 혀를 찬다. 


“....이부장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별로 예쁘지도 않던데.”

 

“누가 좋아한대?”


그렇지. 

석율은 그의 발언에 또다시 경멸을 느끼며 술을 마셨다. 불특정 다수의 여자들에게 동시에 연락하는, 도덕관념이 바닥인 그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히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아는 사람의 뒷통수를 몰래 치는 스릴에 빠져서 저지른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또 만날 겁니까? 이번엔 물티슈 준비해놔요?”

 

“이 씨발... 뭐하는거냐 새끼야? 나 괴롭히려고 따라다녀?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몰라요? 몰라서 물어?”

 

“넌 나한테 잘못 안 했어?”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바텐더는 둘을 째려보았으나, 이미 둘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각자의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이 소시오패스같은 새끼...! 나한테 왜 이래?”

 

석율은 그의 빌어먹을 소시오패스 운운에 참았던 분노를 통째로 터트렸다.

 

“뭐,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는 대리님이잖습니까! 사람을 자기 맘대로 조종하려고, 어? 그 여자도 스릴 있어서 만난 거 아닙니까? 도덕관념 하나도 없는 당신이 소시오패스 아니냐고!”

 

“당시인? 하. 이 새끼 봐라? 가정교육을 어떻게 쳐 받아 와서 사수한테 말버릇이 이 따위야? 사수 엿먹이는 너 같은 새끼가 소시오패스지!”

 

준식 역시 언성을 높였다.

 

“가정교육?” 석율은 입 안으로 그의 막말을 곱씹으며 크게 웃었다.

 

“당신, 대리님들하곤 잘 지내잖아. 윗사람한테는 아주 입 안의 혀가 따로 없잖아! 당신 인사고과에 영향 있으니까 어? 그런데 난 더 아래급이니까 잘 보일 필요가 없어서 이용해 먹은 거잖아. 당신 한 몸 편하려고 남들 이용하는 거, 그게 소시오패스야. 알겠어? 당신이 소시오패스라고!”

 

“그게 그렇게 나빠? 그리고 나만 그러냐?”

 

“또라이같은 새끼, 말도 더럽게 안 통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취한 데다 이성을 잃어서 단어를 고르지 못하고 소리치는 석율의 말에, 준식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석율을 쳤다. 생각보다 꽤 아픈 주먹에 바를 잡고 간신히 넘어지지 않은 석율은 곧 몸을 세워 그를 쳤다. 뒤이어 격하게 벌어진 몸싸움에 바텐더는 경찰에 전화를 했다.

 

 

 *

유흥가에 위치한 파출소에는 이른 저녁부터 진상들이 붐볐다. 격무에 찌들고 지쳐 보이는 경찰은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쌍방폭행이신데 합의하시죠.”

 

“저 사람이 먼저 쳤는데도 쌍방이에요?”

 

“내가 더 많이 맞았거든?”

 

“어허, 언성 높이지 마시고요. 누가 먼저 쳤든 같이 때렸으면 쌍방이에요~ 뭐, 고소하시려면 하셔도 되긴 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심드렁하게 이야기하는 경찰 앞 접이식 의자에 나란히 앉아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입 안으로 시발시발 욕을 중얼거렸다. 별 수 없이 서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의할 수 밖에 없었다. 


경찰서에서 나오자, 본격적으로 붐비는 시간이 되어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준식은 경찰서 유리문에 엉망이 된 자기 얼굴을 비춰보고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석율 역시 멍이 든 뺨과 터진 입술을 보고 화가 더럭 났다.

 

“이런 씹! 한석율 이 새끼야 남의 얼굴을..!”

 

“제 얼굴은 뭐 멀쩡합니까? 이렇게 해놓고!”

 

“...두 분, 뭐 다시 오실라고?”

 

경찰이 빼꼼 문을 열고 느긋하게 말을 걸자, 이를 갈면서 서로 노려보던 두 사람은 입술을 깨물고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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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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