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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연재했던 석율준식 소설 '심상하고 특별한'을 묶어서 책으로 내려고 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여 주세요~

http://me2.do/xBbi4qAc



*표지커미션: 소년 님


Posted by 마.지
,

바라는바다(cest-bon.tistory.com) 님과의 석율준식 릴레이 블로그 링크입니다.

http://yulsik-in-the-trap.tistory.com/


심심하실 때 들러주세요~



Posted by 마.지
,

7:3은 3:7

짧은 망상 2015. 10. 20. 19:47

준식은 인트라넷에 올라온 워크샵 공지를 보고 인상을 썼다. 뭔 놈의 워크샵을 또 가. 봄에 가지 않았나? 돈이 썩어 나나? 그렇게 돈이 썩어나면 16층에 캡슐커피머신이나 놔 주지. 등등은 속으로 하는 생각이고, 겉으로는 반기는 척을 해야겠기에 입꼬리를 올려 본다.

“성대리, 한석율씨, 공지 봤지?”
“예, 과장님. 기대되지 말입니다.” 

준식은 자기보다 더 잽싸게 사회적 애교를 부리는 제 부사수를 흰 눈으로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어~ 과장님. 산행이라는데요, 단풍이 끝내주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단풍 보면서 술 한잔, 죽인다! 캬~ 응?”

가족이 모두 외국에 가서 혼자인 문과장은 환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준식과 석율은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작위적으로 웃었다.

*

“기대? 입에 발린 말 참 잘해, 우리 한석율씨.”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이런 거 엄청 좋아하지 말입니다. 다 같이 퐈이팅넘치게 건배! 산행! 단체생활 캬~”
“.....”
 
준식의 생각과 달리 석율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막내 포지션도 크게 싫어하지 않았다. 바쁘게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나로 인해서 조직에 피가 돈다’ 류의 자아도취를 느끼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어진 준식은 들고 있던 A4지 뭉치를 돌돌 말아 공연히 석율의 뺨을 톡 치고, 고개를 기울이며 예쁜 척 하는 걸 흐린 눈으로 보며 그를 탕비실에 남겨놓고 나왔다.



워크샵 장소는 단풍으로 유명한 강원도 모 산의 콘도였다. 계약직인 실무직들이 없어 수가 줄었지만, 평소 같으면 퇴근하여 침대에 누워 있거나 가족과 즐겁게 보낼 시간대에 거대 연회장에 줄줄이 앉아 건배하고 환히 웃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물론, 결혼 10년차 이상인 사람들은 제외하고.

누구를 위한 회식인가 싶던 자리도 술이 돌고 연회가 점점 흐트러지면서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윗대가리들은 별도 룸으로 빠지고, 나머지들도 팀별로 슬슬 모이거나 방으로 사라져 각자 잡담과 함께 음주분위기가 되었다. 술이 오르자 팀별 모임도 섞여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자 동기 모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목말라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단정한 자세를 유지 중이지만 꽤 취한 영이가 답답한 듯 단체 티셔츠 목을 당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백기가 즉각 반응했다.

“1층 가서 사 올까요?”
“문 닫았더라구요.”
“편의점 가죠.”
“아니에요. 꽤 멀던데.”
“편의점? 그럼 난 설#임! 아 탄산수도! 과자도!”

엉덩이 들 태세였던 백기는 냉큼 끼어들어 대답하는 석율을 보고 인상을 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왜 한석율씨 아이스크림을.”
“아, 알았어. 그러지 말고, 우리 게임해서 지는 사람이 가는 걸로 하자구, 친구들, 어때?”
“무슨 게임이요?”
“당연히 대작?”
“싫습니다.”
“자기가 불리하니까.”
“그냥 끝말잇기 해요. 저, 백기씨, 석율씨 순서.”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보며 영이는 진지하게 운을 띄웠다.

“그럼 할게요. 칼륨.”
“장백기 딱! 걸렸네, 없네~.”
“륨본드.”
“뭐야. 백기씨, 전문용어 쓰기 있어?”
“드!”
“거 참 왜 소리를 지르고... 드라마.”
“마그네슘.”
“영이씨, 저 미워해요? 슘페터.”
“헉 미친! 그걸 또! 슘페터... 터...”

석율이 막히는 순간 둘은 눈을 반짝거렸다.

“10, 9, 8...”
“아니 영이씨, 이러기야? 카운트다운 갑자기 왜 생겼는데?”
“7, 6...”
“아 잠깐 잠깐마안~”

분명히 단어가 있을 텐데 술기운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을 구르며 반항하던 석율은 결국 패자가 되어 나설 수밖에 없었다.

*

편의점은 콘도에서 나와 주차장 아래 내리막길을 한참 지나 숲길로 걸어가야 있었다. 석율은 추리닝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산이라 제법 쌀쌀한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 숙여 불을 붙인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숲길 옆 바위 위에 동그마니 앉은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복슬복슬하게 부풀고, 혼자 튀게 단체 티셔츠가 아닌 새파란 티를 입고 앉아 먼 곳에 눈을 두고 있다.

“성대리님.”

준식은 석율의 목소리에 두 손을 들며 반겼다.

“썽뉼아~ 우리 썽뉼이, 왜 나왔어.”

취했구만. 괜히 아는 척 했다는 후회에 석율이 발걸음을 슬슬 물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준식은 반색하며 바위 위에서 달랑 뛰어내려 다가왔다.
 
“대리님은 왜 나와 계십니까?”
“나? 나야 뭐...”

준식은 말 끝을 흐리며 석율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은 담배를 재빨리 가져다 한 모금 피웠다.

“어디 가?”
“아이스크림 사러... 같이 가실래요?”
“갔다 와라.”

그가 손을 내젓는 걸 보고 석율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 하려고 했으나.

“아, 잠깐만.”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역시나, 하고 멈춰 섰다.

“왜요.”
“가는 김에 내 꺼도 사와.”
“뭐 사다 드려요?”
“뭐든 너 사고 싶은 걸로, 10개.”
“열 개요? ...대리님도 벌칙으로 나오셨죠?”
“들켰네~"

준식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거렸다.

“찾아보고 있으면 그런 걸로 사와. 그런 거.”
“뭐 말씀이십니까. 비#빅? #밤바? 아님 붕어빵모양 그거?”
“우리 한석율씨 역시 눈치가 빨라.”

심부름을 맡아 심사가 뒤틀린 두 사람은 악의적으로 낄낄 웃었다.

“프흐, 가시죠.”
“아니, 너 갔다 오라고.”

물론 석율은 끝까지 웃지 못했지만.

*

석율은 오르막길을 느적거리며 올라왔다. 양 손에 봉투를 든 데다 숨이 차서 슬슬 화나는 마당에, 팔다리 편하게 늘어뜨리고 앉아 자기한테 뺏은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준식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

“사왔습니다.”
“어~ 썽뉼. 수고했어.”

봉투를 받아 들려던 준식은 석율의 가슴에 뚫어지게 시선을 두었다.

“또 왜요.”

석율은 짜증난 티를 내려다가, 긴 손가락이 티셔츠 아랫자락을 잡고 훌렁 들치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뭐 하시는!"
"섰네?"
"섰...? 아니 이거 놓으시라구요! 익!"

실제로 서울보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유두가 서서 티셔츠 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 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있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석율은 몸을 흔들어 준식의 손을 떨쳤다.

"성희롱 아닙니까?"

준식은 다 피운 꽁초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너랑 나 사이에 성희롱은 무슨."
"사귀는 사이에도 성립하지 말입니다."
"여고생처럼 왜 그래? 닳냐?"
"워우, 소름돋아. 그럴 때 진짜 아저씨 같은 거 아세요?"
"내 꺼 줘. 이거, 딸기맛."
"...."

평소처럼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석율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 포기하고, 비인기 아이스크림들 사이에 숨어 있는-원래는 자신이 먹으려고 산-요거트맛 바를 꺼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짙은 핑크색 얇은 혀 끝으로 연한 핑크색 바를 핥아 올리고, 불투명한 흰 액체가 혀 위로 녹아 내리는 것을 보고 괜히 귀가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으나, 곧 들고 옆눈으로 훔쳐 보았다. 야외에서 옷도 들침당한 마당에 망상이 그렇게 큰 죄랴 싶었다. 숲 옆 길을 차박차박 발걸음 소리만 내며 말없이 걸어올라가던 석율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준식에게 맞춰 섰다.

"에이. "

준식은 아이스크림을 다른 손에 옮겨 쥐고 탈탈 털었다. 손등에 연한 핑크색으로 방울져 녹은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있었다. 석율은 허리를 굽혀 봉투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준식의 손을 잡았다. 준식은 제 손등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핥는 숙인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일 듯 말듯 잘 생긴 눈썹이 찌푸려져 미간에 선이 가고, 예민한 피부를 지나는 혀 끝은 간질거리고, 치뜨는 눈은 건방졌다.

"...대리님."

준식은 그가 제 입가를 핥고 달콤한 맛이 남은 혀와 입 안을 맛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려뜨린 손에 들린 하드가 녹아 아스팔트에 희미한 얼룩을 만들었다.

*

"그래서, 마부장 거기서 백만원 털렸잖아."
"미친 새끼! 후환은 어쩌고?"
"존나 기억못해. 하나도 기억못한다고오~"

석율은 허세스럽게 떠드는 준식을 흐린 눈으로 보며 봉투에서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꺼내 모두에게 내밀었다. 말랑한 기분이 되어, 아이스크림만 건네고 준식과 같이 사라지려고 했는데 갔다 와 보니 어찌 된 노릇인지 대리들과 자신의 동기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입 안 뿐 아니라 몸을 팔 안에 바짝 안고 누구보다 가깝게 맞대고 싶은 욕망은 자신만의 것이었는지, 성준식은 제 동기들과의 잡담에 금방 빠져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술을 한 잔 따르러 왔던 석율은 준식에게 어깨를 잡혀 옆에 억지로 앉았다.

"야, 얘가 왜 째려보고 있냐?"

취한 준식은 울화 때문에 여즉 곤두서 있는 석율의 한 쪽 유두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성.. 성대리님."

버럭 화내려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겨우 웃으며 가슴을 가리는 석율을 보고 대리들은 낄낄 웃기 바빴다. 이미 만취해서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데다, 같은 남성이라서 경계심도 희미했다.

"나도 해 볼래, 띵동~"
"이리 와 봐, 우리 한석율씌!"

석율은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슬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본인이 오지랖이 넓은 만큼 많은 것에 관대한 그였지만 이건 좀 곤란했다. 그 때, 준식이 석율 앞을 막아섰다.

"야!!! 이것들이...! 어디서 함부로 건드려~ 남의 사수를."

취한 목소리지만 꽤 정색하고 있었다. 석율은 근본적인 원인제공자가 성준식이라는 것도 잊고 감동했다.

'웬 일로 대리님이 날...'
"만지려면 돈 내고 만져!"
"감사.... 예??!!!"

준식은 경악으로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뻐끔대는 석율을 뒤에서 안았다.

"한 번 누르는 데 만원."
"폭리 아냐?"
"만원 내지 뭐. 평소에 인사 잘 하고 일도 잘하니까."
"아니! 아니 잠깐 이건! 제 인권은요? 악!!"

석율이 발버둥치고 대리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만원씩 내는 동안, 백기는 흐린 눈으로 구석에서 탄산수를 마셨다. 영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못 도와줘서 미안합니다, 한석율씨.'

석율이 강제 띵동을 당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 사과하던 그는 강해준 대리가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제 옆에 앉는 바람에 얼른 병을 집어 들었다. 존경하는 제 직속 사수가 저런 남학교스러운 장난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강대리님, 저, 한 잔 드리겠습니다."

해준은 백기의 말에도 묵묵히 잔을 받으며 붉어진 눈매로 그를 멀거니 보다가, 갑작스레 그의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백기가 얼어붙어 있는 동안 한 번에 잔을 다 비우고 그걸 되돌렸다.

"백기씨도 한 잔 받으세요."

돌이 된 듯 굳은 백기의 뒤로 한석율이 아햐학 간지럽..! 그만하시라구여! 하고 발버둥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메아리쳐 들려 왔다.

*

"뭘 그렇게 삐지고 그러냐. 장난이잖아."
"상대방도 재미있어야 장난 아닙니까?"
"아홉, 열, 열하나. 십일만원 벌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늘 그렇듯 귓등으로 안 듣는 태도에, 석율은 길게 한숨을 쉬고 준식을 노려보았다.

"...반띵해요. 제 몸인데 저도 권리 있지 말입니다?"
"넌 재료만 제공했지, 포장해서 상품으로 만든 건 나잖아? 7:3."

아아앍.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들끓는 분노를 꾹꾹 누른 석율은 '3'을 강조하느라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내밀고 있던 손목을 낚아채 품에 당겨 안고, 가는 몸을 덮쳐 눌렀다.

"썽뉼아, 형 피곤하니까 비켜라."
"아까 하던 거 계속 하시죠."
"싫어."

손바닥으로 뺨을 밀치던 준식은 순순히 안 밀려나는 석율에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어? 이것 봐라. 야 한석율, 싫다고."
"이것도 장난으로 쳐주세요. 장난인데 왜 그러십니까."
"꼭 따져야겠냐?"
"꼭 따져야겠는데요."

석율은 머리카락이 뭉텅 잡히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발버둥치는 몸을 누르고 파란 티셔츠를 걷어 건조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핥았다. 준식의 유두는 바짝 서 있었다.

"섰네요."
"넌 이 새끼야, 꼭 그렇게 고대로, 아, 돌려줘야 직성이..!"

유두를 혀 끝으로 자극당하는 찌릿한 느낌 때문에 붕 뜬 채 불평하던 목소리는 조심성 없이 와 닿고 혀를 물어 당기는 입술에 의해 중간에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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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대리님이 처음에 말리다가 '만지려면 돈내고 만져'라고 말하는 상황은 낮달님 ‏@rlgudeh0216 썰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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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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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율과 성준식은 회사 근처의 일본식 선술집에 앉아 있었다. 같이 밥 먹자고 했을 때처럼, 준식은 먼저 제안한 주제에 말을 하지 않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 너머로 석율을 한참 관찰하고는 조금 술이 오르고 나서야 입을 연다.

“썽율아. 내가, 살다가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본다.”

석율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도 성대리님 같은....”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일단 말대답을 하다가 또 성준식이 성질을 부릴까봐 지겨웠고, 두 번째론 성준식 같은 인간을 처음 본 건 확실히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은 살면서 심심치 않게 보아 왔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스스로는 자기가 그 정도로 양심 없는 급은 아니고, 그저 내 몫을 먼저 챙길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석율이었지만- 장그래가 지적했듯 성준식과 같은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성준식은 한석율이 여태껏 보아 왔던 그 부류의 인간들 중에서도 급이 달랐다. 요령이 좋고 판단이 빠른 석율은 그런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재주껏 피하거나, 이리저리 구슬러 역으로 자기 취할 것을 취하면서 잘 대처해 왔다. 하지만 성준식은 처음으로 만난, 상사라는 피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으며 구스르기에는 자신보다 사회 경험도 요령도 월등해서 도저히 석율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멈췄던 말을 다시 이었다.

“성대리님 같은 사람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성대리님 정도의 사람은 처음 봅니다.”

“아~ 그래. 대단하다. 나도 참 나지만, 너도 참 너다.”

준식은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는 듯 두 눈썹을 치켜올리고 다시 마셨다.

“....저 같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어. 지겨워, 아주.”

점점 혀가 꼬이기 시작한다. 준식은 석율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지겹다고 또박또박 말하고, 안주도 내버려두고 술을 마셨다.




서로의 술잔을 채워 주다 보니 사케가 벌써 여러 병 째였다. 또다시 바닥을 드러낸 도꾸리병을 탕 소리가 내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준식은 본격적으로 취한 목소리를 냈다 .

“야, 썽율아. 넌 남자새끼가 무슨 눈물이 그렇게... 엉?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나쁜 놈 맞는 것 같지 말입니다....”

“뭐?”

입 안으로 궁시렁거리는 대꾸에 눈 밑의 살이 접힐 만큼 잔뜩 인상을 쓴 준식은 헛웃음을 웃고, 길게 술내음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어쩌다 이런 게 내 밑으로 들어왔냐.”

“이, 이런 거요? 헐. 솔직히 제가 아깝...
그럼, 제가 아니라 장백기씨나 안영이씨, 아님 장그래씨였으면 잘 맞으셨겠습니까?”

성준식은 그의 말을 듣고 신입이었던 3인방을 차례대로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장그래. 고지식하고 사회화가 특이하게 되어 있어 피곤하다. 장백기. 마이페이스인데다가 은근히 고집이 있는 타입이라 만만치가 않다. 안영이. 예뻐서 마음에 들지만 그 하성준도 쩔쩔매는 걸 보면 역시. 처음부터 살갑게 들이대며 눈치 빠르고 싹싹하게 일을 받던 한석율이 넷 중에선 제일 만만했다.

“.....네가 제일 낫다.”

“이거 봐. 그렇죠? 그런데. 대리님은 그런 저를 막.”

“아 이 새끼 또 시작이네.”

“갑자기 왜 인간 취급해주기로 한 겁니까?”

“징징거리는 거 지겨워서 그런다.”

“그 전에는 안 지겨워하셨잖습니까. 한결같이 괴롭히셨잖아요, 소나무처럼 푸르게. 예?”

술기운이 오른 석율은 슬슬 조심성을 잃고 다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아오! 야 한석율 이 새끼야. 너 이러는 거 완전 싸이코 수준이야, 알고 있냐?”

“이것도 혹시 나중에 저 엿먹이시려고 그러시는겁니까? 아님.”

이게 뭐라고 하려나 눈알을 굴리며 다음을 기다리던 준식은 뒷말에 기함했다.

“....같이 자서 그런 겁니까?”

그 말 한마디에 짜증이 확 올라온 듯, 손에 든 잔을 거칠게 내려놓고 석율을 쏘아본다.

“미쳤냐? 네가 여자도 아니고, 잤다고 내가? 그리고 그 얘기는 끝내기로 했잖아!”

그는 옆에 두었던 웃옷과 가방을 집어들었다.

“술 맛 다 떨어지네.”

석율은 일어나려는 준식의 팔을 잡았다. 알콜 기운이 잔뜩 오른 한석율의 입술과 뺨은 발그레해졌고 원래도 물기가 많은 눈이 강아지처럼 간절하게 눈을 마주쳐 왔다.

“성대리님.”

“아 왜!”

알 수 없이 소름이 돋은 준식은 팔을 휘둘러 손을 뿌리쳤다.

“저는....”

말을 잊지 못하다가,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 석율은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준식은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석율은 한참을 바라봐도 미동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꾹 찔러도 잔뜩 취한 듯 요지부동이었다 .

준식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엎어진 채인 석율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그에게 한석율은 아무리 봐도 정말 이해불가의 희한한 인간이었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게 당연함을 받아들이고 적당히 맞춰 주며 참다가, 후임이 들어오면 그 후임에게 똑같이 떠 넘기면 될 일이건만. 요령도 좋게 재빠르게 대세를 파악해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제에, 어떤 면에선 어이없게 고지식하다. 장그래를 어떻게든 회사에 남겨 보려고 애쓰던 모습을 떠올린다. 한석율의 겉모습만 생각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타인에 대해 자기만의 어떤 이상을 한구석에 늘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석율은 큰 눈으로 뭔가를 바라는 듯이 응시해 오며, 손익에만 집중하는 메마르고 무감한 자신을 흔들어서 있는지도 모르던 감정을 긁어내려고 애를 쓰는지도 몰랐다. 너무 성가셔서 성의 없이 대충 어리광을 받아준 순간 예상치 못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성준식은 당황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그조차도 발칙하기 그지없는 석율의 겉모습 속에 숨은 나약함과 상처를 조금쯤은 깨달았고, 그 이후부터 내내 찝찝했다. 인간의 효용에 따른 분류 카테고리에 넣고 파일을 탁 닫아버릴 수 없도록 끈질기게 의식 한 구석에 달라붙어오는 한석율을 어찌해야 할지 스스로도 몰랐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준식은 다시 석율을 불렀다.

“석율아.”

“한석율.”

그는 테이블 밑으로 석율의 발끝을 툭 찼다. 석율은 몸을 일으키며 붉게 충혈된 눈을 떴다. 이마를 짚고 흐느적거리며 탁자에 턱을 받치고, 한참 헤매던 눈을 들어 준식을 본다. 옆으로 기댄 채 안주도 없이 사케를 홀짝홀짝 마시던 준식 역시 잔을 내려놓으며 석율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매일 보지만 낯선 눈앞의 존재를, 각자 취기에 흐려진 눈에 힘을 주어 선명히 보려고 애썼다. 같은 부분은 같은 대로 다른 부분은 다른 대로 계속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평행선과 같은 관계에서, 좁혀지지 않는 거리 저 너머를 응시한다.






*

석율은 택시를 잡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윗옷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손을 들어 부르고는, 눈썹 끝으로 속도가 느껴질 만큼 가깝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버리는 택시 뒤꽁무니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누가 떠미는 것도 아닌데 자동으로 휘청대는 몸에 힘을 주려고 노력하면서 시계를 들여다본다. 이미 밤 2시가 다 되었으니 할증에, 그나마도 술집이 밀집되어 있는 이 곳에서 잡으려면 미터기 꺾고 타야 할 것 같았다. 취한 머릿속으로 계산을 댄 그는 포기하고 보도블럭 위로 올라갔다.

“성대리님. 그냥 저기로 가시죠.”

준식은 택시 승강장 의자에 앉아 멍하게 담배를 피우며 석율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대한 엠오티이엘 다섯글자가 반짝이는 간판을 보고 마뜩찮은 표정을 한다.

“저길?”

“택시 잡다가 밤새우겠습니다.... 저 내일 8시까지 나와서 회의준비 해야 되지 말입니다.”

엉망으로 혀가 꼬인 채 투덜거린 석율은 준식의 옆에 털썩 앉았다. 윗옷을 입으려고 노력했지만 취해서인지 소매에 팔을 잘 끼울 수가 없었다.

“소매 어디 갔냐...”

준식은 석율이 허부적대는 꼴을 보기만 하고 도와주지는 않으며 낄낄 웃었다.

“자알~찾아 봐.”

준식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 석율은 청담동 며느리마냥 어깨에 웃옷을 걸친 채로 일어났다.

“전 그냥 저기 갈 겁니다. 대리님은, 뭐, 알아서 하시고요...”

그의 말에 담배를 비벼 끈 준식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율은 잠깐 필름이 끊겼다가 정신이 들었다. 촌스러운 꽃무늬 벽과 답답한 분위기는 아까 그 모텔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 누워 있다. 무념무상으로 천장 벽지를 보던 그는 갑자기 준식과 같이 왔음을 생각해 내고 취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자기가 옷을 입고 있는지 살폈다. 셔츠부터 바지까지 꼭꼭 잘 입고 있음을 알고 안심하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준식이 어디 갔는지 살피려고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씻고 있는 듯 했다. 그 소리를 듣자 지금 누구랑 같이 이 공간에 와 있는가가 갑자기 확 다가와서, 석율은 술이 점점 깨어나는 동시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한 번 실수를 저질러 놓고 깊은 생각 없이 온 자기 자신이나, 같이 가잔다고 온 성준식이나 도긴개긴이었지만 어쨌든 편치 않았다. 그 사이 준식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석율이 일어난 것을 보고 멈칫했으나, 곧 말도 없이 프론트에서 주는 칫솔이 든 하얀 비닐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석율이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얼굴에 툭 부딪히고 떨어졌다.

“앗, 야, 받아야지 그걸.”

“미안하다고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리셨나...”

다 들리게 하는 석율의 혼잣말에도 신경쓰지 않고 침대에 쓰러져 고개를 묻는다. 술기운이 기분좋은 단계를 넘어 몸을 괴롭히는 단계로 접어든 듯, 신음을 하며 한숨을 내쉰다. 석율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불과 다섯시간 후면 회의실에 말끔한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 몸을 씻으러 갔다.


꽉 막힌 속이 답답해 거하게 구토를 하고 나자 두통이 몰려오며 취기는 좀 가셨다. 석율은 미식거리는 속을 달래려 칫솔질을 하며 충혈된 눈을 거울로 들여다보았다. 준식과 술만 마시면 불편함 때문인지, 아니면 쌓인 감정 때문인지 자제력이 사라져 이 지경이 되어 버린다.



욕실에서 나온 석율은 속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며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준식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석율은 이불 끄트머리를 들추고 누웠다. 회사에서도 둘만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장소적 특성상 신경이 곤두서서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알람을 맞춰 놓은 뒤 눈을 감았으나, 점점 머릿속이 맑아져 다시 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창 밖에서는 아직도 거리를 헤매는 취객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위인지 옆인지 모를 어디에선가는 메아리처럼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등을 돌리고 누운 성준식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쉬고, 옅은 바람소리 같은 소리가 공간을 점점 채워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석율은 준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등과, 그 위로 말끔하게 깎아 올린 뒷목을 본다.


한참 동안 숨소리를 듣고 있던 석율은 일어나 앉았다. 좁아터진 창문 너머로 모텔의 벌건 네온사인 빛이 들어오는 아래, 잠든 준식의 얼굴은 너무도 낯설었다. 난처한 상황에 밀어 넣어놓고 모르는 척 굴리는 눈동자, 부드러운 말투로 빈정거리는 표정, 조금만 수틀리면 대놓고 적의를 내비치는 눈빛과 표정들. 자신에게 신물나게 많이 보여 주었던 표정들 없이, 무의식의 세계에 빠진 준식의 얼굴은 석율의 눈에 박혀 있던 이미지는 아니었다.

씻으면서 얼굴에 붙은 폼밴드를 떼어버렸는지 눈 밑으로 드러나 있는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석율은 손 끝으로 살짝 상처를 건드려 보았다. 따가운 듯, 얼굴 근육이 약간 움찔하며 찌푸려졌다가 다시 표정이 사라지고 고요한 얼굴이 된다. 이제 보니 입술 위 말고 귀에도 점이 있었다. 약간 처진 눈썹과 선이 고운 코와 입은 자고 있으니 착해 보인다. 석율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런 얼굴이었나. 이 사람이 허용범주에 넣어 준 사람은 이런 얼굴을 보는 걸까.



석율은 입술의 점을 살짝 눌러 보았다. 준식의 입술이 벌어져, 스치는 감각이 손가락 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준식은 잠에서 깨어났다. 석율은 깜짝 놀라 손가락을 뗐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뜬 준식은 아직 자신의 얼굴 근처에 있는 석율의 손을 보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손을 반사적으로 밀어내는 얼굴에는 답지 않게 당황의 감정이 대놓고 떠올라 있었다. 몸을 굳히고, 잠이 깬 듯 눈을 크게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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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은 넘었지만, 한석율과 성준식은 야근중이었다. 러시아와 협업이 늘어나면서 제안서 작성과 더불어 자료도 수집하느라 석율은 아주 바빴다. 마우스를 하도 눌러 손목이 아플 지경인 석율의 등 뒤로 준식이 다가와, 책상에 그가 제출했던 제안서를 툭 던졌다.


"한석율, 다시 해."


석율은 그 종이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집어 들었다. 온통 빨간 글자 투성이었다.


"언제까지나 신입인 줄 알아? 똑바로 못해?"


준식은 고개를 숙인 석율을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준식은 이 자식이 또 건방지게 대들려나 싶어 같이 공격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고개를 든 석율의 표정은 그가 자주 보던 것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성대리님.”


준식은 순순한 대답에 좀 놀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던 오른손을 뺐다.


“뭐가?”


“틀린 데 가르쳐주셔서요. 전에는...”


석율은 말을 하다 멈추고 쓰레기통 쪽을 본 후, 입을 오므렸다 펴고 고개를 까딱 숙인다. 보지도 않고 여러 번 쓰레기통에 처박혔던 전적에 비하면 첨삭은 감지덕지할 수준이었다. 


준식은 석율의 행동을 본 후 몸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펜 끝을 입술 사이에 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이 빠질 듯이 자료와 기사를 대조 비교하고 있던 석율은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준식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키실 거 있냐는 듯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갸웃 하자 하고 준식은 고개를 잘게 흔들고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최근에 같이 일하면서 석율이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성준식은 일을 잘 했다. 일손도 빠르고,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없는지를 잘 파악하여 석율의 제안서를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줄 수도 있었으며 안목도 있었다. 수정본을 가져다 바친 석율은 선생님한테 혼나는 학생처럼 벌쭘하게 옆에 섰다. 그가 한 장씩 넘겨보며 쏟아내는 지적을 들으면서, 괜히 인센티브 2위는 아니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이래가지고 퇴근하겠어?"


"성대리님."


"음?"

준식은 자동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렇게 일을 잘 하시는데 그동안 왜 저한테 다 떠넘기셨습니까."


"아, 얘 또 이러네. 심심해? 싸우자고?"


"제가 어떻게 대리님하고 싸웁니까."


"사람 쳐 놓고 말은 잘 한다."


"대리님도 저 치셨잖습니까."


"말대답 하지 마."


"예."


"아, 예도 하지 마!"


성질도 더럽게 이빨을 드러내며 언성을 높인다. 


‘성질머리하고는...’ 


석율은 순간 인상을 썼지만 입을 다물었다. 준식의 옆얼굴을 내려다본다. 자신의 주먹에 맞아 멍이 들고 한쪽이 터졌던 상처가 많이 아문 듯, 이제는 붙어 있는 폼밴드의 면적이 많이 줄어 있었다. 멍이 빠진 자리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주변 피부보다 더 짙은 자국이 남아 있다. 그 위로 글씨를 빠르게 좌우로 훑는 눈동자와 깜빡거리는 눈썹까지 시선을 올렸다. 밴드 끝이 피부에서 조금 떨어져 너덜거린다. 석율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꾹 피부에 눌러 다시 붙였다. 


순간 준식이 과도하게 놀라서, 석율도 놀랐다. 그는 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인상을 쓰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죄송합니다. 떨어지려고 해서.”


본인의 뺨을 톡톡 가리키며 알려주는 석율을 보는 눈은 간헐적인 빠르기로 감겼다가 뜨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제안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시선을 돌려 노트북 화면을 보고, 버릇인 듯 펜 끝을 얇은 입술 사이에 문다. 지금까지 내내 보면서도 몰랐는데, 입술위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펜을 물어뜯는 입술을 따라 점이 옴짝거린다. 그걸 바라보는 석율의 다물려 있던 입술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서 조금 열렸다. 건조한 사무실 공기 때문에 메말라 버린 자신의 입술 표피가 붙었다가 떨어지는 느낌을 스스로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석율은 또다시 불합격을 받은 제안서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일을 마치고 나니 전 층에서 남아 있는 사람은 둘 뿐이었다. 석율은 컴퓨터를 끄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준식에게 인사를 했다.


“애쓰셨습니다.”


준식은 보지도 않고 입 속으로 으음 하고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 석율은 미적대면서 그가 준비하기를 기다렸다. 


“성대리님.”


“왜 또.”


준식은 석율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힘겨운 듯, 입을 오므린 채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드는 걸 반복한다. 또다시 성가셔 질 것 같아 짜증스러워진 준식은 얼른 가방을 챙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버튼을 누르고, 아무도 이용하지 않아 아주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뒤따라와 같이 기다리던 석율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렇게 일하니까 좋지 말입니다.”


“뭐가, 야근하는 게?”


“아뇨. 저기.....같이, 일하는 거요.”


입 안으로 우물거리면서 그 말을 하는 석율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준식은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돌아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정말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점차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본다. 




말없이 타고 내린 두 사람은 정문을 나섰다. 석율은 허리를 굽히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애쓰셨습니다.”


준식은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대답을 했다.


“....너도.”


그는 단 두 글자에 한석율의 표정이 다시 멍해지는 것을 보았다. 커진 눈이 흡사 강아지처럼 점차 촉촉해진다. 그 표정을 보고, 준식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한석율의 뺨을 쳤다. 


“악! 헐? 뭡니까 갑자기!”


세게 맞은 것은 아니고 가볍게 찰싹 소리가 나고 말 정도였지만, 너무 황당해서 석율은 뺨을 손으로 감싸쥐고 소리를 쳤다. 무심코 그랬던 건지 준식 역시 놀라서 제 손을 내려다본다. 그는 고개를 들며 얼굴 가득 인상을 썼다.  


“도대체 왜 우냐고!”


“제가 언제 울었습니까!”


“지금 울려고...”


“저 안 울었! 와... 나.”


석율은 솟아오르는 화를 참으려고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채 하늘을 보며 입술을 질근질근 물어뜯었다.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긴 준식은 한숨을 길게 쉬고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똑바로 섰다. 


“...썽율아. 우리 술 한잔 하러 갈까.”


석율은 일순간 거절을 하려다 말고,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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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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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ㅍ님과 미도님(@dustrises, @ceremonyofaria) 두 분의 합작썰을 바탕으로 쓴 짧은 글입니다. 원래 썰은 참 재밌었는데...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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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식은 팔짱을 끼고 마지못해 설교를 듣고 있었다. 식사 잘 챙겨먹고. 연락 좀 네가 먼저 해 봐라.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어쩜 이렇게 무심한지 몰라. 등등 끝도 없는 잔소리가 이어지는 것에, 그는 신물난다는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나이에 비해 곱고, 고생이라곤 안 해 본듯 보동보동한 얼굴을 한 그의 어머니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아들의 얼굴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가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석율이 다음에 보자.”


“예 어머님 안녕히 가세요. 얼굴 뵈니 좋네요.”


“어머님은 무슨.... 지가 무슨 며느리야 뭐야.”


준식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환히 웃으며 싹싹하게 배웅하는 석율의 뒷모습을 보고 다 들리도록 투덜거리다가 핸드백으로 어깨를 두드려 맞았다. 


“아 씨..! 엄마 왜 때려!”


“왜 때려어? 너 나이 서른둘이나 먹어가지고 언제 철들래? 반말에, 뭐 엄마? 석율이 반만 닮아봐라 좀.”


째려보면서 알차게 두 대 더 친 준식의 어머니는 석율 앞에서는 돌변하여 천사처럼 웃었다. 


“우리 석율이 잘 있어~”


“안녕히 가세요.”


붙임성 있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두 손까지 애교 있게 짤래짤래 흔든다. 또 맞을까 봐 문이 닫힐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준식은 그제서야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 나. 우리 석율이랜다. 야, 썽율아. 너무 잘하는 거, 그것도 눈치 없는 거야. 적당히 하면 안 되겠냐? 나만 미움받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으며 고소해하는 표정을 보니 평소에 혹사당한 걸 이렇게 푸는 것 같았다. 


“이렇게 뒤가 구린 새낀줄도 모르고...”


석율은 준식의 말에 웃으면서 다시 일할 준비를 했다. 외면하는 아들의 옆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성준식의 어머니. 석율은 그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려 이건 오지랖이지 싶으면서도 준식에게 말을 꺼냈다. 


“잘 좀 해 드리지 그러십니까. 외로우신 것 같던데.”


“우리 엄마가 뭘 외로워. 마사지에 문화센터에, 얼마나 바쁜데.”


“그런 거 말고요.”


석율은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부모 맘을 모르시네. 자식만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잖아요.”


“네가 부모라도 돼 봤냐? 어떻게 알아.”


“저렇게 철이 없으니 어머님이...”


“야 소름끼쳐! 어머님은 무슨.”


중간에 말을 잘라버린 준식은 곧 닥쳐올 저녁타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석율은 좀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언제까지 속이실 겁니까? 좋은 분인데. 솔직히 양심에 찔려요.”


“그러니까 너무 잘해드리지 말라고.”


“근본적으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뭐면 어때. 어차피 내가 결혼할 것도 아니고. 걱정 안 하게 해드리면 됐잖아.”


컵을 하나하나 야무지게 씻어서 엎어 놓는다. 석율은 심기가 불편한 듯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보았다. 준식의 어머니는, 성관념이 프리해서 남녀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놀다가 본가와도 절연하다시피 한 아들자식이 영영 떨어져 나갈 것이 불안해서 어떻게든지 정착시켜보려고 결혼 이야기도 꺼냈을 것이다. 그런데 성준식은 거기다가 대고 자기가 더 편하게 놀고 싶다는 이유로 사귀지도 않는 석율을 구실로 들이대고 있으니. 참 사람 마음 모른다 싶으면서도, 자신도 공범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랑 사귀면 걱정 안 되신대요?”


“그렇겠지. 우리 석율이래잖아.“


석율은 행주질을 하는 준식의 옆으로 갔다. 쉬지 않는 그의 손놀림을 보며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다. 준식은 석율의 시선을 눈치 채고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평온한 자세 뭐냐. 일 안 해?”



“...그럼 정말 저랑 사귀실래요.”


석율의 어조는 차분하고 낮았다. 손을 멈춘 준식은 고개를 들었다. 석율은 말간 얼굴로 느리게 눈을 감고 다시 뜨고, 일상의 그것보다 더 짙은 눈빛으로 준식을 본다. 아직 서툰 그를 구박하며 가르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한 번도 이렇게 제대로 눈을 마주해보지 못했던 준식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석율의 낯선 느낌에 갑자기 어색해졌다. 주변을 물 흐르듯 흘러 스쳐지나가야 할 일상의 한 부분이 튀어나와 발에 걸려서 주의를 끈다. 

석율은 팔짱을 풀었다. 고개를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기울이며 한 걸음 다가온다. 준식은 숨을 들이키고, 자기도 모르게 반쯤 뒤로 물러났다. 




“어, 지금 좀 긴장했죠!”


낯선 얼굴은 곧 익숙한 미소로 온데간데없어졌다. 


“....죽을래?”


석율은 준식 특유의 빡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사장님 안 되겠네. 저한테 흑심 품고 계셨어요?”


“내가 해도해도 너한테까지 흑심 품겠냐?”


“뭐야... 제가 더 아까운데요? 착하지, 잘생겼지, 나이도 어리지.”


“나이도 어린데 실성했네.”


그의 대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석율은 여보, 어머님이 하루에 한번은 전화하래요- 따위의 상황극을 계속하다가 서릿발같이 차가운 시선을 받고 얼른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인근의 회사 퇴근 러쉬가 시작되기 직전의 짧은 망중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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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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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8세, 군필 남자. 
남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게 사회적으로도, 스스로도 용인되는 조건은 아니었으나, 한석율은 그러고야 말았다. 그 동안 내내 말끔한 얼굴을 꾸미고 모른 척 하며 자신을 자근자근 밟아대던 상대가 ‘일부러 괴롭힌 게 맞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비참함을 참고 표정을 관리하느라 억눌렸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울컥하며 뒤집어졌던 마음이 좀 가라앉고 나자 급격하게 쪽팔림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한 손에 준식이 건네 준 커피컵을, 다른 한 손에는 부직포 케이스를 들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쪽팔림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머쓱하게 인사를 한다. 그를 올려다보는 준식의 얼굴에는 진력난다는 표정과 약간의 비웃음이 같이 섞여 떠올라 있었다. 

“그래 잘 가라, 찔찔아.”

석율의 두 뺨은 빨개졌다. 역시 성준식답게 남의 약점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헐...!!! 왜 그렇게 못됐습니까? 학교 다닐 때 여자들한테 따돌림 안 당했어요?”

“아닌데? 인기 터졌는데?”

“이렇게 사람 맘을 못 읽는데도요?”

“남자새끼가 질질 짜놓고.”

“왜, 왜 그랬겠냐고요!”

“아, 미안하다고!! 고만 좀 하세요, 네? 염증난다 새끼야.”

“사과가 뭐 그래요.”

“넌 군대에서 다구리 안 당했냐? 이렇게 아래위가 없는데.”

“아니거든요. 대리님한테만...!!”

또다시 결론이 없는 말싸움이 될 것 같아, 석율은 입을 다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싸우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3초를 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서로 사과했으니까 이제, 저 안 괴롭히시는 겁니까?” 

“나만 나쁜 놈인 것처럼 말하네. 너도 너거든.”

“그래도 따지자면 대리님이 좀 더 나쁩니다.”

“와 나... 보다보다 너 같은 인간 처음 본다.”

“딴 데선 안 이러지 말입니다. 대리님이 절....”

“아오!!!!”

성준식은 다시 열이 뻗쳐 눈을 부라렸다. 성질 같아서는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입을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뒤에 수습할 일이 피곤해서 간신히 참았다. 그는 인상을 쓰고 석율을 윽박질렀다. 

“야, 간다며. 안 가냐?”

석율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지하철 방향으로 가려고 준식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자, 그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고 멈칫 했다. 발이 한 걸음 물러나려다가 멈춘다.

“...지하철, 이쪽이라서요.”

대답 없이 다시 팔짱을 끼고 시선을 피하는 준식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석율 역시 그의 반응에 민망해져서 눈을 깜빡였다. 피차에 넘어가자고 했지만 성적으로 선을 넘었었다는 사실이 서로의 마음에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소리와 사람 소리가 들리는 실외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삽시간에 어색해져버린 공기를 피하기 위해 석율은 서둘러 지하철로 향했다. 




성준식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찌푸린 채 석율의 뒷모습이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기분이 복잡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원망스럽게 말하며 물기가 가득한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을 다시 회상한 그는 기가 막혀서 다시 헛웃음을 웃었다. 

‘미친... 남자새끼가.’

남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된 것을 보니, 석율이 여러 번 주장하던 대로 상처를 많이 받았었구나 싶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죄책감은 인정하기가 싫었다. 관계가 극악이 된 것은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사과할 생각도 없었던 그였다. 물론, 그 얼굴을 보고는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예전엔 상사라고 숙이는 시늉이라도 하던 한석율이 이렇게까지 할 말 다 하면서 부딪혀 오는 배경에는 자신의 우스운 꼴을 그가 봤다는 사실, 또 성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이 깔려 있으리라는 판단도 그의 기분을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석율 쪽에서 다가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긴장하는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이유로, 석율이 뭘 바라든 앞으로도 그와는 편하고 원만한 관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준식은 혀를 차고 집으로 돌아갔다.




석율은 아직 좀 빨간 눈을 하고 지하철을 탔다. 주중에 격동하는 감정의 파랑을 겪고 나서 맞이하는 주말은 묘하게 초연한 느낌이었다. 경멸하는 마음에 들이박았다가 의외의 모습을 보고 약해지고, 약해지는 자신이 싫어 상대에게 재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라고 억지를 부리고, 그리고. 

뭐 씹은 표정으로 지겹다는 듯이 말하는 ‘미안해’란 말에도 자신의 마음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의 태도 변화는 왜일까, 자신이 먼저 사과했기 때문에? 아니면 서로 못 볼 꼴을 너무 보여서?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되묻던 석율은 자신이 성준식에게 바라는 것이 이렇게도 별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부직포 케이스의 지퍼를 좀 열어 보았다. 자신의 옷이 칼처럼 깨끗하게 잘 손질되어 들어 있다. 이딴 건 버리라고 타박을 들었던 넥타이도 구김 없이 손질되어 걸쳐져 있었다. 석율은 넥타이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가 따끔한 통증에 손가락을 뗐다. 준식이 넥타이가 아래로 빠지지 않도록 옷핀으로 한 번 꽂아놓은 것이었다. 

참 세심하기도 하지. 이래서 그렇게 세심하게 괴롭혔었나. 
석율은 피식 웃고는 피가 조금 솟아나온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한석율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여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안 보이려고 노력하는 성준식은 주말 약속을 다 취소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할 일이 없어진 그는 거실 소파에 뒹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하릴없이 보지도 않는 티비 채널을 넘기기도 했다. 카톡목록에 뜬 아는 여자들의 프로필사진을 한 번씩 전부 눌러 보기도 하고, 결국 지겨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들어다보고 씁...소리를 내며 살색 밴드 끝을 살살 떼어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언제 빠져.”

옅어져서 오렌지가 섞인 오묘한 색으로 변한 멍을 들여다보고 투덜거린 후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지고 와 소파에 앉았다. 그는 패션 채널을 틀어 놓고 끝없이 반복해서 앞으로 걸어나오는 모델들과 그녀들이 걸친 옷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입에 와 닿는 타인의 입술도. 당연한 듯이 입을 벌려 받아들인다. 마주 대는 혀 끝은 질척대지 않고 조심스럽다. 배꼽 아래에서부터 가슴까지 매만지는 손이 다정했다. 손은 곧 속옷 안으로 들어와 그의 것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묘하게 서툰 손길에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올려 상대방과 눈을 마주쳤다. 까맣고 큰 눈동자가 점점 짙어지는 욕정으로 흐려지며 자신을 들여다본다. 전기가 명멸하듯 몇 가지 단상이 번뜩이며 지나가고, 이미 사정해버린 그의 위에 묵직하게 올라탄 상대가 빨라진 호흡을 목덜미에 토해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성대리님.”




성준식은 번뜩 눈을 떴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였다. 방금 지나간 것은 취기로 인한 꿈이거나 아니면.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그날 아침처럼 창백해졌다가 이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한석율은 막 내려진 커피를 마시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장을 넘겼다.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결론 없는 생각에 휘둘리고 있었다. 
     

장그래를 한낱 경쟁자, 소문의 무스펙 낙하산, 정사원 입성에의 서포터 정도로 생각하던 자신이 그를 받아들여 대등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던가.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과 상황을 읽는 능력, 자신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대범함을 보고서였다. 


     
성준식에게 한 인간의 범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실마리는 무엇인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 역시 일터에서 만난 사람을 백 퍼센트 인간적으로, 인간성이 좋아서 받아들인 적은 없다. 웃고 편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이유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정보수집의 목적이 함께 있었으며, 남을 돕는 이면에는 역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측면이 분명히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므로, 계산을 넘어 인간적인 측면의 교류가 생겨나고 그것은 확연히 작용한다. 
     

그러나 성준식은.
그가 친하게 지내는 대리들과는 어떨까. 그가 여러 가지를 감수하고 뒤를 봐 주었던 그 여자는. 그는 타인에게 관심이 있던가. 타인까지 갈 것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는...?
     

- 네 눈에도 내가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냐고 물으려던, 자기 감정도 몰라서 후배에게 묻는 성준식인데. 자신이 상처 입은 걸 깨달았다면 상대방 역시 그랬을 거란 것도 연결 짓지 못할 만큼 감정적인 기반이 빈약한데 그런 교류가 존재할까.
     
     
석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왔다. 그 인간이 뭐라고 황금 같은 주말에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월요일 아침, 석율은 언제나처럼 여유를 두고 출근하여 빈 사무실에 1등으로 들어와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주말 동안 별 일이 없었는지 인트라넷과 메일을 확인한다. 그와 십분 가량 차이를 두고 성준식이 토박토박 들어왔다. 
     

“좋은 아침”
     

석율은 언제나와 같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성의 없이 흘리는 준식의 인사에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씹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갔다. 쟁반에 컵을 담아 온다. 
     

“한석율, 커피.”
     

석율은 보지도 않고 손 끝으로 시키는 그의 옆 자리에 믹스 컵을 내려놓았다. 
     

“이거 말고.”
     

“그럼 여기...”
     

“나 평소엔 이거 안 마시잖아.”
     

“그럼 여깄습니다.”
     

준식은 세 번째 컵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는 쌩트집에 대응할 수 있도록 3종의 커피를 모두 가지고 와서 차례대로 내려놓고 있었다. 
     

“...커피 안 마실래.”
     

“그럼 물 드시죠.”
     

물컵도 준비해 왔다. 준식은 기가 막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석율은 왜 뭐요. 라고 말하는 듯한 건방진 눈빛을 겨우겨우 누르고 입을 오므리고 시선을 마주해 온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의 트집에 작은 소리로 한숨을 쉬고는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을 터였다. 
     

“주스 드릴까요.”
     

“됐어...”
     

성준식은 기운이 빠진 듯 물컵을 집어 들었다. 석율은 나머지를 치웠다. 
     

“저 이제 안 괴롭히기로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그래?”
     

“........처음부터 다시 얘기할까요?”
     

“왜, 또 울려고?”
     

석율은 순간 욕을 입 밖으로 낼 뻔 했다. 토요일로 돌아가서 성준식 앞에서 볼썽 사납게 눈물을 흘리던 자신을 패 주고 싶어진다. 준식은 붉은 기가 도는 석율의 뺨을 올려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애 쓰고 있다고 했잖아.”
     

준식의 말투는 평소에 남들 앞에서 석율을 갈굴 때 나오곤 하는, 평온하면서도 날이 선 것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가 꾸중에 못 이겨 억지로 사과하듯, 입 안에서 흐리게 중얼거린다. 석율은 시선을 돌려버린 준식의 옆얼굴을 보았다. 지랄할 때는 바락바락 또박또박 잘도 얘기하는 주제에, 사과 또는 그 비스무레한 것은 이렇게도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렇게도 기분이 풀린다. 
     

‘쉽네. 쉬운 인간이네, 나.’
     

석율은 스스로가 이미 학대에 길이 든 것 같아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학을 하는 한편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꺼낸다. 
     

“대리님, 그런데 왜 갑자기...”
     

“너 또 울까봐.”
     

“.......”
     

진심을 얘기할 리가 없는데 물어본 자신이 바보였다. 화도 나지 않아서, 석율은 그냥 쟁반을 가져다 놓으러 갔다. 8시 30분이 넘으면서 팀원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서 활기차게 인사하는 소리가 가벽 너머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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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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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식과 한석율은 계단참에 서 있었다. 준식은 석율보다 한 단 위에 올라선 채, 손에 든 꽃다발을 흔들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아~ 이런 미친.... 야 한석율! 요새 누가 장미에 안개꽃을 하냐?”

“죄송합니다.”

“이걸 얻다가 들이밀라고... 야. 가서 안개꽃 빼고 다시 포장해 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얌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석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대리님, 저도 그러고 싶은데 네 시부터 외근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야!”

석율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준식을 계단참에 버려 둔 채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와 윗옷과 가방을 챙겼다. 석율 역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새빨간 장미에 새하얀 안개꽃을 촌스럽게 갖다 붙여 꽃다발을 만들어 온 것은 다분히 고의였다.

“여친 선물까지 심부름 시키고 지랄이야. 싸패새끼가...”

석율은 외근을 나서며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거래처에서 협의를 하고 과장한테 전화로 보고를 끝낸 시간은 저녁 7시였다. 과장은 그대로 퇴근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오랜만의 이른 퇴근에 신이 난 석율은 친구라도 만날까 싶어 재빨리 연락을 돌려 보았으나, 갑작스런 호출에 바로 나올 만한 사정이 되는 친구는 없었다. 석율은 평소에 잘 들리는 바로 향했다. 화이트데이인데다 유명한 장소라 모든 테이블은 커플로 꽉 차 있어서, 석율은 할 수 없이 바텐더 앞에 앉았다. 안면이 있는 그에게 오늘도 상사에 대한 욕을 하려던 석율은 갑자기 크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나쁜 새끼야!”

“진짜 오해야! 그게 아니고..!”

“오해 좋아하네! 그 년이나 만나! 멸치같은 게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그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듯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빨간 장미꽃다발로 앞의 남자를 세게 후려쳤다. 이어서 구둣발소리도 요란하게 나가 버리고 말았다. 남의 싸움이라면 언제나 환영인 석율은 상대남자를 살피려다가 놀랐다. 빨간 장미다발로 쳐맞은 것은 다름아닌 성준식이었다.

“에이 씹...!”

머리에 올라와 있는 빨간 장미꽃잎들을 털어내면서 욕지거리를 하고,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동댕이친다. 석율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손 아래 입이 웃고 있는 걸 혹여나 성준식이 고개를 돌려 볼까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몸보신을 하려면 이 상태에서 못 본 척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상책이었으나, 성준식이 망신당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그를 당황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컸다. 석율이 갈등하는 사이, 준식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가리듯이 숙이고 사라지려던 그는 석율과 눈이 딱 마주쳤다. 석율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너...!”

놀라서 눈이 커진 성준식은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꼴보기 싫은 후배에게 하필 가장 창피한 순간을 보인 것이 자존심 상한 것이었다.

“대리님. 괜찮으십니까?”

“재밌냐?”

“무슨 말씀이신지...”

“너 입이 웃고 있다?”

석율은 다시 입을 가렸다.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과를 하려고 눈을 들었다가, 웃을 마음이 사라졌다. 성준식의 눈 아래부터 뺨까지 길게 가시에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대리님, 얼굴...”

성준식은 갑자기 뻗은 석율의 손길에 놀라 몸을 물렸다.

“왜?”

“상처났는데요.”

“뭐? 아 나 진짜.”

성질을 부리며 휴대폰을 꺼내 얼굴을 비춰본 준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석율은 번화가 초입부에 위치한 큰 약국에 준식과 같이 있었다. 이른 퇴근이 갑자기 상사 뒤치다꺼리로 변한 것에 짜증을 내면서도, 석율은 연고와 폼을 사서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거울 없어요?”

“없습니다.”

짜증났다고 써있는 얼굴로 묻는 질문에 차가운 얼굴의 약사 역시 냉정하게 대답했다. 준식은 서 있는 석율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붙여봐.”

“....예.”

아까 빨리 사라졌어야 되는데. 석율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약을 꺼냈다. 준식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면봉에 연고를 묻혀 대충 바르던 석율은 성준식의 얼굴이 너무나 낯설어서 놀랐다. 지랄거리느라 눈을 부라리거나, 이를 앙다물거나, 교묘하게 엿먹이면서 아닌 척 하는 재수없는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아무 악의 없는 고요한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감은 눈 아래로 코와 입은 의외로 선이 곱다. 재수없는 표정을 짓지 않으니 착해 보인다. 윗입술 가운데에는 점이 있었다. 상처가 쓰라린 듯, 작은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달싹거리고, 얇은 눈꺼풀 안으로 안구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석율의 손이 멈춘 것을 알고, 준식은 눈을 떴다.

“야, 뭐해?”

다시 재수없는 표정이 돌아온다. 멍해졌던 석율은 허둥거렸다. 다시 눈을 감는 그의 눈꺼풀과 뺨에 바르고, 폼을 붙여 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먼저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는 석율의 얼굴을 상기되어 있었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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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준식은 굉장히 길었던 하루 후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등 뒤로 현관문을 닫고 신발장 위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을 본다. 덕지덕지 불쾌하게 붙어 있는 밴드를 다 잡아 떼어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어깨를 눌러 오는 피로함은 대부분 한석율 탓이었다. 근 이틀간의 언쟁-몸싸움-기억도 나지 않지만 충격은 안겨준 섹스-다시 언쟁-몸싸움으로 이어진 미친 대립은 결론도 없이 휴전 상태로 끝났고, 이후 하루 종일 뒷자리에 앉은 그의 존재 자체가 피곤했던 준식은 스스로도 느낄 만큼 지쳐 있었다.

 

석율이 즐겨 쓰는 향수 냄새가 그가 빌려준 옷에도 희미하게 배어 준식의 신경을 거슬렀다. 지긋지긋한 한석율이 집에까지 끈덕지게 따라온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준식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하나하나 옷을 벗어 떨구던 그는 몸 곳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갑작스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석율의 셔츠를, 이어서 윗옷을 차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오!!”

 

노성을 지른 그는 화를 풀 방법이 없어 숨만 거칠게 쉬었다. 한석율에게든 이 상황 자체에게든, 하여간 화가 치밀어 가라앉지 않는다. 자존심이 구겨져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성준식은 이런 상태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는 무난한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라나, 비교적 영특한 머리와 괜찮은 외모로 그다지 큰 난관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타인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는지 잘 파악하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 그에게 관계란 일종의 공식이었다. 적절한 공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만큼 타인을 관찰하고 정보를 얻을 뿐, 그 외의 측면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인간관계를 그런 감정적인 면에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석율과의 관계 역시 상하 권력 구조가 무너져서 분노했다고 생각했는데, 한석율은 생각도 하지 못한 말로 자신을 당황하게 했다.

 

-미안해요, 상처 줘서.

 

상처. 한석율의 눈에 자신이 상처 받은 것처럼 보였던 것인가 싶었다.

 

‘내가 상처받았다고?’

 

침대에 앉은 채 생소한 단어를 곱씹고, '건방진 자식' 하고 욕을 중얼거리던 그는 그 전에도 비슷한 대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뺨에 손을 올리고, ‘상처 줘서 미안해’ 라고 말하던 그 여자. 회사에서 망신을 당해 쪽팔렸고, 인사고과에 미칠 영향이 걱정되었으며, 사업적인 반대급부를 제공하고 얻은 나름 잘 맞던 섹스파트너를 잃었다는 약간의 상실감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도 거기에 상처라고 이름을 붙였다.

 

성준식은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가슴 한 구석을 밟아 뭉개는 것처럼 쭉 느끼던 둔탁한 통증과, 이따금씩 쓰라리게 올라와 혈관 속으로 퍼져 나가는 제 어두운 감정의 이름을 남들을 통해 명명받았다. 자신은 상처받았던 것이다.

 

 

 

 

 

*


“대리님, 제안서 초안입니다.”

 

석율은 준식의 책상에 파일을 올려놓았다. 의도치 않게 팔이 닿았을 뿐인데, 흠칫 한다. 전날의 아무 소득 없었던 언쟁 이후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던 석율은 그의 반응에 짜증이 났다.

 

‘불편하게 왜 이러냐더니... 지는 왜 이래.’

 

초안을 검토하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얼굴 상처는 새로 붙인 살색 밴드로 가려져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는 채 팔만 올려 수정본을 돌려준다.

 

그의 태도를 보자, 석율의 마음속에서 또다시 난폭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날 보라며 그를 잡아 몸을 돌리고 싶다. 석율은 무심코 하게 되는 그러한 상상들에 스스로도 놀랐다. 장그래 말대로, 왜 자신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바라는가 의아했다. 예전처럼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건 약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얄팍한 동정심이 발현되어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의 말대로 같이 자서 나약해졌던가. 갈등 해소를 바라는 이유는 부정적인 감정에 더 이상 얽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 본다. 지금은 복잡하게 얽힌 뉴런의 끝 한 쪽이 그에게 붙어 있는 듯, 단 한순간도 그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갔던 석율은 성준식과 그의 동기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것을 먼발치서 보았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미소를 짓고 아무래도 좋을 농담을 하며 날카롭지 않는 눈으로 동기들을 본다.

 

그에게 인간자원이 아닌 인간으로 보이는 범주는 어디인가. 석율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성준식의 옆모습을 말끄러미 보다가, 그들과 눈이 마주치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성대리, 쟤 걔 아니야? 한석율.”

 

“요샌 어때? 여전히 그래?”

 

성준식은 동기들의 물음에 애써 웃었다.

 

“맨날 그렇지.”

 

“너 진짜 저 놈이랑 치고받은 거 아니야?”

 

하성준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아니라고.”

 

“그래, 그동안 개념 좀 생겼겠지 설마. 쟤도 그렇게 막장이겠냐.”

 

‘그렇게 막장이다 저 새끼가...’

 

준식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 대리님도 저한테 상처줬잖습니까.

 


상사한테 당신도 사과하라고 우기는 어이없이 건방진 한석율의 표정을 떠올린다. 원래도 물기가 있는 까맣고 큰 눈동자에 더 물기가 어리고, 간절하게 쳐다보는 표정. 왜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냐고 원망하는 말들.

 


“야 하대리, 안영이랑 넌 어떤 사이냐?”

 

뜬금없는 질문에 성준은 인상을 썼다.

 

“뭐가 어떤 사이야. 그냥 선후배 사이지.”

 

“그냥 선후배가 어떤 사이냐.”

 

“뭐야. 왜?”

 

“우리 한석율이가, 나한테 자기 인간적으로 대해 달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유형기가 웃으며 끼어든다.

 

“그동안 많이 태우셨어요? 좀 잘 해 주세요.”

 

“뭐, 잘 해 달란 얘기야, 그게?

 

“그렇네.”

 

무심한 성준의 대답을 듣고, 준식은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연기를 내놓았다.

 

‘어리광이었냐.’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갑자기 어이가 없어 짧게 웃었다.

 

 

 

 

 

 

*


토요일 늦은 오전, 한석율은 성준식의 오피스텔 로비에 왔다. 문자로 왔음을 알리자 기다리라는 답장이 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편안한 차림으로 걸어오는 준식의 손가락 끝에 옷걸이가 걸려 있었다. 석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준식은 인사도 없이 석율에게 감색 부직포 양복케이스를 건넸다. 석율 역시 손에 든 그의 옷을 건넸다. 그는 케이스 지퍼를 조금 열어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그게. 세탁을 돌리지는 않았어요.”

 

준식은 흠...하고 입 안으로 대충 대답하고는 지퍼를 다시 닫았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석율과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다시 눈을 돌린다. 말없이 애매한 분위기에 벌쭘해진 석율은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석율아.”

 

“예?”

 

준식은 깜빡거리는 석율의 눈을 마주 보았다.

뭘 얼마만큼 잃었는가에 집중하느라 몰랐을 뿐, 자신은 석율의 말대로 상처를 받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 바닥을 치던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자신과 함께 심리적 상처에 연관된 두 사람은 이미 마음을 다해 유감을 표시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석율이 지긋지긋하게 반복해서 말하며 바라는 것은.


“고마워. 여기까지 갖다 줘서.”

 

준식은 유대리의 충고를 따라 보았다. 
평소에도 영혼 없이 아무렇게나 듣던 고맙다는 말이었으나, 지금의 것은 평소와 달라서 한석율은 놀랐다. 준식은 그의 표정 변화를 보았다.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홉떠졌다. 입이 조금 벌어져 그 사이로 어...하는 무의미한 소리를 내고, 달싹거렸다가 다시 다문다. 심경이 복잡할 때마다 흔히 그러듯, 빠르게 눈을 깜빡인다.

 

“이러면, 인간적으로 대한 거냐?”

 

예상 외의 반응에 멍해졌던 석율은 뒤이어 나오는 말에 곧 한숨을 쉬었다.

 

“됐습니다...”

 

“밥 먹었어?”

 

“예?”

 

“밥 먹으러 가자. 옷 좀 갖다 놓고 올게.”

 

기다려. 라고 말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석율은 석상처럼 수트케이스를 한 손목에 걸치고, 어린애처럼 올라가는 숫자판을 보며 기다렸다.

 

 

 





*


성준식과 한석율은 준식의 오피스텔 근처 해장국집에 앉아 있었다. 석율은 몸에 밴 듯 재빠르게 수저를 준식의 앞에 놓아 주고 물을 가져다준다. 그렇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에 필요한 싹싹함이 아예 버릇이 된 그의 행동이 새삼 준식의 눈에 들어왔다. 

“...싹싹하네.”

“예?”

그의 말에 일단 놀란 후, 석율은 약간 두려워졌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설마 주중에 일어난 일로 인해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일부러 이랬다가 다시 뒤통수를 칠 생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준식을 관찰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 아래 숨은 속마음을 읽어 보려고 애를 쓴다.

“뭘 봐.”

“아뇨....”

얌전한 척 고개를 숙였으나 석율의 눈빛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준식은 자신을 몰래 관찰하며 뎅글뎅글 굴리는 까만 두 눈을 모르는 척 하고 밥을 먹었다.  

성준식은 같이 밥 먹자고 해 놓고서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석율은 잘 넘어가지 않는 밥알을 삼켰다.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어색해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것 같았다. 뻔뻔한 게 장점인 한석율이지만, 준식은 친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가 편하게 자기 페이스대로 대화를 끌어나갈 수 있는 여느 회사동료도 아니었다. 상사, 그것도 척을 지다 못해 심지어는 술 먹고 같이 사고도 친 상사가 아닌가. 

석율은 얼마 전 몇 가지 조각으로만 생각났던 기억과, 그 기억에 같이 딸려온 애틋한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오전의 햇빛이 쨍하게 들어오고 중년 남성들이 식후 커피를 마시고 쯥쯥 입맛을 다셔 대는 현실적이기 그지없는 공간 안에서, 복 없이 밥을 깨작대는 부스스한 준식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그를 애틋하게 생각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진다.

‘내가 왜. 내가 더 불쌍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노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준식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왜.” 라며 인상을 쓰는 것을 보면. 석율은 고개만 흔들고는 남은 밥을 먹었다.




준식은 식사 후에 가보겠다고 인사하는 석율을 자신의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한 카페로 다시 끌고 갔다. 

“왜요.”

“너 그놈의 왜요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석율은 버팅겨 보았지만 끌려갔다. 준식은 그가 무심코 하는 짓들을 가만히 보았다. 허리에 손을 짚고 불만이 가득한 눈을 양쪽으로 굴린 석율은 손에 들고 있던 부직포 양복 케이스를 사람이 앉은 모양새로 자기 옆 좌석에 걸쳐 놓고는 토닥토닥 두드려 폈다. 준식의 앞에 마주 앉아 손을 깍지 끼고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눈을 들어 마주치고 옆으로 굴렸다가 마주치기를 반복한다. 표정에 반항기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이전까지 ‘저 꾸준하게 건방진 자식을 어떻게 찍어 누를까’ 에 집중하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자신도 상처받았다고 사과하라던 건방진 말 속에는 여린 부분이 숨어 있었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는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준식은 입을 열었다. 

“석율아. 난 너한테 사과 안 해.”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또다시 빈정거린다. 그의 말투 때문에, 준식은 불과 몇 초 전에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감정을 잊고 바로 짜증을 냈다. 

“아 씨... 이게 또 건방지게 이러네. 야, 나만 잘못했냐고. 네가 먼저 열 받게 했잖아.”

“성대리님이 먼저 절 인간 취급 안 하셨... 아 됐습니다. 

이러다 또 경찰서 가겠습니다.”

“너 자꾸 인간적 타령 하는데, 너도 남들한테 그렇게 싹싹하게 구는 게 인간적으로 좋아서는 아니잖아? 회사에 일하러 왔지 사람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 나도 말단 신입일 땐 그렇게 살았어. 싹싹하게, 자질구레한 일 다 하면서. 너랑 나랑 다른 게 뭐야.”

“다른 게 뭐냐니 와! 성대리님은 절 막 이용하고 막! 전 일단 상사라서 최대한 도우려고 했지 말입니다.”

“원래 상사 돕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용할 수도 있지. 넌 살면서 아무도 이용 안 했어?”

“전!”

당당하게 그런 적 없다고 말하려던 석율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장그래 일도 그랬고 솔직히 백퍼센트 그랬다고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기 기준으로는 성준식이 잘못했는데, 대화하다보니 자꾸 말리는 것 같아 화가 치민다. 

“성대리님은 심하셨잖습니까. 다 떠넘기고 결과만 가로챘잖아요. 전 대리님이 그러실 줄 몰랐습니다. 상사 좋다고, 인품 훤칠하시다고 하고 다녔는데.”

준식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석율은 간이 배 밖에 나온 듯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 당당함의 배경이 되는 무의식에는 다른 이유 - 둘이 같이 잤다는 사실- 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준식은 기분이 나빠졌다.  

“뭐, 가로채? 대단하다 한석율. 내가 그렇게 우습냐? 하고 싶은 말 다 하네?”

“......우스운 게 아니라. 절대 우습게 생각한 게 아니라요. 그냥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 병신 만들었잖아! 그걸로 끝내.”

“뭘 그걸로 끝내요, 그 일 있고 내내 일부러 괴롭혔잖습니까.”

“내가 뭘.”

“일부러 괴롭혔잖아요! 일도 알면서 몇 번씩.. 휴가도..!”

“아 알았어. 일부러 괴롭힌 거 맞아. 게시판질로 나 엿먹이려고 한 게 너무 괘씸해서 그랬다, 이 지겨운 새끼야.”

말만 하면 결국 끝도 없는 싸움이 되는 패턴에 진력이 난 준식은 유대리의 충고를 잊고 또다시 버럭 화를 냈다. 석율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얘가 또 왜 이러나 싶어 찌푸리고 보았던 준식은 진심으로 놀랐다. 



“미친..!! 너 왜 울어?”

“......”

“야 한석율! 애냐? 네가 무슨 소녀야?”

“.......”

고개를 숙이고 말도 움직임도 없는 석율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내려, 테이블 위로 툭 툭 연이어 자국을 만든다. 눈이 커서인지 눈물방울도 무지 컸다. 성준식은 어마어마하게 당황했다. 유치원 때 장난으로 짝의 치마를 들쳤다가 울린 이후 이 정도로 당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혀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리에 멀쩡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안절부절하다가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본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울린 신선한 나쁜 놈의 등장에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흥미롭게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준식이 사는 오피스텔 1층이라 눈에 익은 얼굴도 여럿 있었다. 


얼굴이 벌개진 준식은 이를 꾹 깨물고 작은 소리로 윽박질렀다. 

“미친놈아, 울지 말라고!” 

“그렇죠? 일부러 괴롭힌 거 맞잖습니까. 그동안 제가...얼마나!”

석율은 낮은 목소리로 꾹 눌러 말을 했다. 그가 또다시 폭발하여 자신의 생활 영역에서 지랄발광을 할까 두려워진 준식은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참고 할 수 없이 그 대사를 하고야 말았다. 

“.....그래, 미안하다. 괴롭혀서 미안했다고. 됐냐?”

석율은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가득한 두 눈으로 원망스럽게 노려본다. 준식은 으...하고 낮게 신음을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준식에게 끌려 나온 석율은 양복 케이스를 품에 안고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준식은 들고 나온 테이크아웃 컵을 석율에게 내밀고 옆에 앉았다. 

“넌 소시오패스도 아니고 싸이코야 싸이코... ”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경험에 탈진한 그는 힘 빠진 목소리로 석율을 나무랐다. 석율은 손에 든 커피컵 뚜껑의 커피얼룩을 내려다보면서 말대답을 했다. 

“맞아요. 그리고 소시오패스는 성대리님이고.”

“지겨우니까 그만 해 좀. 네 말대로 인간 취급 해 주려고 애 쓰고 있잖아!”

석율은 눈을 들어 준식의 옆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왜요...?”

그의 질문에 준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석율을 본다. 마주친 눈은 평소에 그가 동기들을 대하듯 평온하지 않았지만,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한석율은 성준식이 동료로 인정해 주는 범주를 찾아 들어가려고 했으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곳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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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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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던 준식은 갑자기 귀를 때리는 전화벨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는 완전히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으려고 헛기침을 했다. 수화기 안에서 나오는 맑고 명랑한 목소리는 프론트였다. 


“.....체크아웃시간 연장하시겠습니까?”


체크아웃.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는 몸을 일으켰다. 시계는 벌써 11시였다. 





연장을 거절한 그는 옆에서 역시 시체처럼 잠든 석율의 어깨를 가차 없이 흔들어 깨웠다.


“한석율, 일어나!”


“어? 왜 왜요...”


석율 역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황망하게 일어났다. 


“11시다. 12시까지 간다고 했는데...”


나른함을 떨치고 일어나는 석율과는 달리 마음이 급해진 준식은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내려가 체크아웃을 했다. 






해안도로 옆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면서 석율은 아쉽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 한 시간 봤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 때문이잖아. 지금 봐.”


준식은 점점 속력을 내면서 석율을 탓했다. 석율에게는 몹시 다행인 일이었지만, 평일 오전 강원도 국도에는 차가 많이 없었다. 어제보다 좀 공포가 가신 그는 마음을 놓고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준식이 앞만 보고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대놓고 그쪽을 보았다. 준식은 석율의 시선을 알았지만 다른 이유로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석율아, 현성이한테 전화 좀 해. 한 시간만 늦는다고.”


“제가요?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준식은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석율을 보았다. 


“너랑 여행 간 거 다 알아. 빨리.”


석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자신과 달라서 경계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성준식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묘하게 직설적이었다. 석율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전화를 해 늦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준식의 말대로 스피커폰으로 돌려 주자, 준식은 그에게 몇 가지를 알려주며 달랬다. 


“...못 하는 건 그냥 지금 안 된다고 죄송하다고 해. 빨리 갈게.”


- 빨리 오세요~


매우 난처한 말투로 울먹이기라도 할 듯이 이야기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 현성이 울겠네.”


“우리 현성이이?”


준식은 갑자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말투를 따라하는 석율을 곁눈으로 보았다.


“지금 그거 따질래?”


“우리 현성이래. 와 충격. 

우리 석율이도 그냥 부르는 거였어요? 나한테만 그러는 건 줄 알고 막 설레고 그랬는데 막.”


“.......”


“우리 현성이래. 와. 말도 안돼.”



정신이 사나워진 준식은 거침없이 악셀을 밟아 쇳소리가 나도록 가속을 했다. 석율이 꿍얼거리던 입을 다물고 급히 손잡이를 잡는 것을 보고 픽 웃었다.





서울 근교에서 현실 GTA를 경험한 석율은 그가 차를 반납하는 동안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무사히 차에서 내린 순간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새 삶을 다짐한 터였다.


“우리 썽뉴라. 가자.”


“...아 나, 됐어요. 우리 석율이는 무슨.”


“그럼 그냥 석율아, 빨리 일어나~ 우리 현성이 기다리니까.”


“에이 진짜!”


발끈하는 걸 보고 웃는다. 어린아이처럼 검은자가 큰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고 섬세하고 손가락이 긴 손이 귀엽다는 듯 머리 위에 올라왔다가 내려간다. 얄미운데도 두근거렸다. 석율은 남들 앞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를 핥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


금요일 저녁, 늦게 퇴근한 석율은 준식을 만났다. 짧은 휴가 이후 꽤 바빴지만 석율은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주말이 될 때까지 일을 했다. 현재 완전히 빠져서 몰입하고 있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업무에서 그를 힘겹게 하는 일들의 상당 부분에 진통 효과가 있었던 탓이었다. 준식이 예약해 놓은 바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술을 하며 각자의 일상을 현재 생겨난 접점으로 가져와 이야기했다. 석율은 턱을 괴고 당겨 앉아, 역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 준식과 눈을 마주했다. 테이블 아래로 다리가 겹친다. 




만날 시간이 적다고 불평하던 석율은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담배를 피우며 속에 담고 있던 망상을 꺼내기 시작했다. 


“형이랑 같은 회사 다니면 좋겠어요. 근무시간에도 잠깐씩 보게. 탕비실에서 만나고 막. 옥상에서 같이 담배도 피우고.”


“그래? 네가 직장후배면 너 일 다 시키고 난 놀 것 같아.”


준식은 잔을 기울이면서 천연스레 대답했다. 그의 말에 갑자기 너무 그림이 잘 그려져서, 석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건 안되겠는데. 상상하니까 화나네요.”


그는 눈썹을 내리며 생생하게 인상을 썼다. 그 표정을 보고 준식은 웃었다. 






석율은 와인을 마시면서, 명백히 여성 취향의 바를 둘러보고 수상하다는 듯 준식을 보았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 본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분명히 여친이 알려줬어 이거.”

 

“그런 얘기 하는 시점이야? 그럼 넌 .....”


눈썹을 치켜올리고 같이 따지려는 그의 표정을 보고 석율은 웃음을 터뜨리고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럴 때 그의 표정이 귀엽다고 말은 못하지만 귀여워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석율의 폰에 진동이 왔다. 미리보기로 뜨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매우 타이밍이 나쁘게도 석율의 절친이었다. 내용은 ‘뭐해?’ 딱 두 글자였다.  


가까이 앉아 있었기에 준식 역시 그 메시지를 보았다. 진심으로 마뜩찮은 표정을 한다. 그는 석율을 똑바로 보기만 할 뿐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석율은 갑작스레 냉담해진 분위기에 식은땀이 나서 급히 변명했다. 


“진짜 그냥 친구에요.”


“누가 뭐래? 빨리 답문 보내. 뭐하냐잖아.”


준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으나, 눈을 똑바로 뜨고 눈썹 앞머리를 약간 치켜올린 그의 표정은 석율이 익히 아는 심기불편이었다. 


‘으악. 저 표정....’


석율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걸 참았다. 안절부절하는 그를 준식이 부추겼다.


“답해.”


석율은 할 수 없이 창을 띄워 준식과 같이 있다는 답문을 했다. 또 보내면 죽는다고 쓰고 싶은 것을 눈치가 보여 짧게만 답하고 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들자, 여전히 그를 똑바로 보고 있는 준식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준식은 잠시 동안 말을 하지 않다 입을 열었다. 


“고등학생 때 만났다고 했었나?”


석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흐음..하고 애매하게 대답한 그는 계속 와인을 마시며 석율을 뜯어본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좌불안석이 된 석율은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무슨 생각해요?”


“걔 만나지 마.”


석율은 그의 직설적인 멘트에 멍해졌다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진짜 아무사이 아닌데.”


“꼭 만나야 돼? 너 친구 많잖아.”


“제 입장에서 속사정 아는 친구는 만들기 힘드니까.”


“그래서 뭐. 계속 만날 거란 얘기야?”


“질투해주는 건 고마운데 말이죠...”


석율이 웃으면서 넘기려고 하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정색했다. 말허리를 자른다.


“한석율. 막말로 너네 같이 잔 사이 아니냐? 난 이해를 못하겠다.”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말에 석율은 좀 당혹감을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야. 넌 지금 나랑 사귀면서.....”


마시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인상을 쓰는 준식에게 석율이 되물었다. 


“우리 사귀는 거였어요?”


“뭐?”


준식은 어이가 없어서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할 거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얘기야 이 새끼야.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인상을 쓴다. 



“아니, 사귀자는 얘길 안 해서.”


석율이 그렇듯, 준식도 한석율의 표정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뻔뻔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르는 척 뭔가를 요구하는 표정이다.


준식은 화나는 걸 꾹꾹 누르느라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아, 알았어. 석율아, 나랑 사귀자.”


“흠. 생각해 볼게요. 간섭이 너무 심해서 좀 그런데.”


“......!”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는 준식의 표정에 석율은 웃음이 빵 터졌다.


“미친... 야, 관둬. 그냥 그 새끼랑 만나라.” 


“왜이래요, 농담인데. 사귀는 거 맞아요 맞아.”


“사귀니까 안 만날거지?”


“그건 좀...”


안 만난다고는 하지 않는 석율의 대답에 화가 난 준식은 다시 입을 닫았다. 석율은 그의 반응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 난처했다. 오래되고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절친과 안 만난다고는 입에 발린 거짓말로도 말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준식은 지난번에 만났을 때 자신을 바라보며 굳이 석율의 맨 팔을 잡던 그의 손을 재차 떠올리고 있었다. 쓰다듬듯이 잡고, 소매 안으로 조금 들어간 손가락 끝까지 회상한다. 그와 석율은 고등학교 때 만났다. 이 대목에서 또다시 원치 않는 상상을 하게 되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 새끼는 애인 없냐?”


“있었는데 결혼했어요, 얼마 전에.”


준식은 화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석율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


“그런 일도 많아요.”


서로가 각자 다른 부분에서 예민하고, 또한 무심함을 깨닫는다. 

아까보다 좀 가라앉은 그의 눈을 다시 마주하고 들여다보던 준식은 손가락 끝으로 누르고 있던 석율의 폰에 또다시 진동이 오는 것을 느끼고 얼른 자기 쪽으로 당겼다. 


-여기 ㅍㅅ인데 오늘 물 좋음. 그 싸이코 냅두고 와라.


석율은 설상가상인 메시지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준식의 말대로 연락하지 말까 싶은 생각도 좀 들었다. 메시지를 읽은 준식은 결국 술기운까지 더해져서 대놓고 화내기 시작했다. 


“뭐야. 그 싸이코가 나야?”


석율은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와, 이 새끼 봐라? 야 한석율, 얘 좀 불러봐.”


“뭘 불러요.”


“왜, 안돼? 저번에 난 새벽 한시에 불러놓고.” 


“불러서 어쩔라구요 좀.”


“너 지금 그새끼 편드냐?”


“아니 그게 아니라... 으악!”


석율은 난감해서 이마를 짚었다. 그는 화난 준식의 얼굴을 보고 환장하겠는 동시에 즐겁기도 한 양극단의 감정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심장이 떨렸다. 묘하게도 좀 더 화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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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여기까진 왜 왔냐?”


준식은 커튼을 닫고 자신을 안는 석율에게 기가 막히다는 듯 일갈했다. 


“이러려고 온 건데...”


석율은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며 그의 티셔츠를 끄집어 올렸다. 가슴의 예민한 부분을 핥아 자극하다 말고 곧 입 안에 넣어 빨아 당긴다. 


“윽...!”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몸을 비트는 그의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옷을 벗겨 냈다. 등 가운데를 지나 허리를 안고, 더 아래까지 손을 넣자 준식 역시 석율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반쯤 선 그의 것을 준식의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쥐었다. 갑작스런 자극에 숨이 거칠어진 석율은 준식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손놀림을 따라 낮게 신음하기 시작한다. 석율의 턱을 다른 손으로 받쳐 고개를 들게 한 준식은 잘게 신음하며 상기되는 석율의 얼굴을 보았다. 준식은 그의 붉어진 입술이 성감으로 벌어지자 키스해 왔다.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고, 예민하게 느끼는 입천장을 자극하고는 빠져나가 위,아래 입술을 차례로 물어 당긴다.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점막끼리의 느낌, 가장 예민한 부분을 자극당하는 느낌에 석율이 찌푸리자 다시 뒷목을 당기며 입 안으로 침범하여 거칠게 키스한다. 점점 빠르게 자극해 오는 그의 손에, 석율은 그의 입 안으로 신음소리를 뱉으며 사정했다. 석율은 그의 어깨를 잡고, 떼어낸 입술을 목에 묻었다. 석율의 숨이 잦아들자, 그는 몸을 떼고 손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또다시 키스해 온다. 조금 부어서 통통해진 입술을 다시 핥는다. 


석율은 고개를 비틀어 그의 입술을 떨치고 아래쪽으로 내려가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준식은 헉 하고 숨을 토해 냈다. 이미 자극을 받은 듯한 그의 것은 갑자기 뜨거운 석율의 입 안으로 들어가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혀를 굴려 자극하고, 뿌리까지 깊이 물자 가빠진 숨소리는 낮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석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점점 격해지는 신음을 토하던 그는 절정 직전에 가자 몸을 빼려고 했다. 석율은 그의 허벅지를 꽉 잡았다. 그는 거칠어진 숨소리와 함께 석율의 입 안에 파정하고 말았다. 석율이 입 안의 것을 삼키는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이 격하게 달아올랐다. 




석율은 평소와 달리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준식을 보았다. 열기로 달아오른 눈으로 준식의 시원한 팔다리의 선을, 깨끗한 상체의 피부를, 붉어진 얼굴을 보던 석율은 다시 그의 몸을 팔 안에 안았다. 쇄골에서 날카로운 선으로 꺾어진 턱 밑까지 핥아 올렸다. 손을 뒤로 하여 그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몸을 굳히는 그를 침대에 밀어뜨려 눕힌 석율은 바지를 벗겼다. 다리를 벌려 허벅지로 누르고 그 사이로 몸을 밀어넣는다. 괴로운 듯 눈을 피했다가 다시 쏘아보는 준식의 눈 역시 붉어져 있었다. 몸 안으로 침입하는 손가락에 낮게 통성을 내는 것을 깨닫고 협탁으로 손을 뻗는다. 


준식은 미끄러운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석율의 손가락이 깊이, 더 깊이 들어오며 뜨겁고 좁은 안쪽을 천천히 넓힌다. 준식은 석율의 등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불쾌한 느낌을 참았다. 손가락을 뺀 석율은 준식의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이빨을 으득 소리가 나도록 물고 간신히 견디는 것을 보고, 그는 준식의 한쪽 무릎 밑에 손을 넣어 올리고 조금 텀을 두어 그가 숨을 고르게 한 후 한 번에 허리를 앞으로 밀어 넣었다. 


준식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참을 수 없는 둔하고도 벅찬 고통에 헉, 허억 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몇 번을 경험해도 불쾌했다. 


“윽...아파...”


“알아요.”


석율은 팔을 뻗어 쿠션을 가져왔다. 그의 몸이 앞으로 밀리자 준식은 다시 신음성을 토했다. 쿠션을 준식의 허리 밑에 넣어 준 석율은 그와 가슴을 맞대고, 눈을 마주했다. 귀에, 불쾌감 때문에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눈꺼풀에 키스하며 굳은 준식을 달랜다. 




자신은 한 때 손 끝조차 닿지 않았을 것 같은 성준식의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열기와 통증 때문에 몸을 진정시키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받아들여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 버릴 것 같았다. 석율은 다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밭은 숨을 내쉬던 그가 등을 안아 오는 것에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석율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숨을 들이키더니 자신도 모르게 석율의 가슴을 밀어내려는 몸짓을 취하는 두 손을 무시하고 좀 더 깊이 들어가자 긴장으로 굳어진 몸이 자신을 꽉 조여 온다. 이성의 끊이 끊어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그의 어깨를 준식이 안더니 깨물었다. 신음성을 내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고도 고집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결국 석율은 이성을 잃었다. 




깊이 들어갔을 때는 압박감으로, 빠져 나올 때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자극으로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준식의 다리 안쪽이 뜨거웠다. 석율은 그의 허리를 잡고 그 감각에 집중했다. 살이 부딪히는 적나라한 소리와 함께 반복해서 더 가까이 밀어닥치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던 준식은 결국 신음하기 시작했다. 


석율은 눈썹 사이를 찡그리고 안타까운 신음성을 흘렸다. 더. 좀 더. 입 안으로 중얼거린 그는 준식의 마른 등을 안아 올렸다. 결합이 깊어지자 밀려들어오는 감각에 준식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 목덜미에 키스하며 허리를 잡아 쳐 올리자 그는 석율의 어깨를 안았다. 


“하....아, 윽. 그만해....”


“힘, 들어, 요...?”


가쁜 숨에 섞어 끊어 이야기하는 석율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정신없어 하는 채로, 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율의 어깨에 고개를 박고 숨을 몰아쉰다. 


석율은 그의 허리를 잡아 위로 올려,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흥분한 채여서 잘 빠져나와지질 않는다. 그의 가슴과 쇄골을 혀로 핥았다. 


아직 익숙지 않은 준식에게 이렇게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석율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뒤에서 다시 들어갔다. 그의 위에 엎드린 채로 허리를 움직이자, 다시 신음하기 시작한다. 어떤 부분에서 반응하는지를 알고 그 곳으로 박아 넣었다. 그가 고양되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 석율은 더 고양되었다. 가 버릴 듯한 성감을 참는다. 그의 허리를 잡아 깊고 느릿하게 쳐 올렸다. 준식의 악물었던 잇새에서 갑작스레 신음이 터져나온다. 석율은 갈증과 비슷한 감각을 느끼며 계속해서 그의 안쪽으로 반복해서 들어갔다. 아무리 다시 들어가도 부족했다. 다시. 또 다시 침입했다. 자신의 것이 된 듯한 착각에, 자신과 하나가 된 듯한 착각에.


“....미치겠다..아, 형...좋아, 좋아해요.”


“헉. 앗...!!”


마지막 순간, 석율은 강하게 몇 번 쳐 올리면서 크게 신음했다. 준식 역시 신음성을 토해내면서 석율을 꽉 조였다. 석율은 그의 안에서 절정을 맞으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몸을 떨면서 그에게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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