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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오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4.01 심상하고 특별한 - 36 (AU)
  2. 2015.04.01 심상하고 특별한 - 32, 33 (AU)
  3. 2015.04.01 심상하고 특별한 - 28, 29 (AU)



성준식은 알람이 울렸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와 알람을 끈 석율은 죽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손을 뿌리치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준식의 머리 뒤를 다시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가, 반응이 없자 안았다. 그는 몸을 크게 뒤척여 석율의 팔을 떨치고는 일어났다.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이 하늘로 다 곤두섰다.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고 덜 뜨인 눈으로 석율을 본다.


“...몇 시야?”


“알람 울렸어요.”


그는 굉장히 저기압인 채로 머리맡에서 무심코 뭔가를 찾으려다가 멈추고는 채 뜨이지 않은 부은 눈을 깜박거렸다. 석율은 그가 비몽사몽간에 하는 일상적인 행동들을 굉장히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가벼운 자괴감에 고개를 흔들었다. 





준식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주춤했다. 여전히 이물감이 남아 있어서 상당히 불쾌했다. 혀를 차고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는 다리가 풀려서 비틀 했다. 


“어어”


석율이 옆에서 얼른 팔을 잡아 주자, 그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는 팔을 뿌리쳤다. 비척거리면서 내려가서 식탁 앞에 기대선다. 석율은 그가 아침이면 만성적으로 찾아오는 금단증상 때문에 기분이 더 나쁘다는 걸 깨닫고 계단을 뛰어내려가 재빨리 어제 사온 니코틴 껌을 내밀었다. 


퉁퉁 부은 채 껌을 입에 넣고 볼을 부풀린 그는 계속 기분이 나빴다. 석율은 그것마저 귀여워 보여 그를 뒤에서 안고 복실거리는 머리칼에 키스했다.


“손 치워.”


“에이. 까칠하게.”


준식은 싱글싱글 웃는 석율을 짜증난다는 듯 바라보았다. 







양치질을 하던 준식은 세면대 거울 안의 자신을 보았다.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으면 뭔가 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넘고 보니 그냥 심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여태까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러나 몸에 남은 느낌이 불쾌해서 짜증은 났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느릿느릿 양치질을 하던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가 울컥 화가 났다. 


“야.”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부르는 목소리에 귀여운 척 웃으면서 왜요? 하고 대답하는 석율을 보고, 준식은 더 화가 났다. 


“이게 뭐야. 여름인데.”


석율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목덜미의 자국들을 보고, 시선을 위로 올려 싸늘한 그의 눈길까지 보고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와, 심하다. 오늘 밖에 못 나가겠는데요?”


그러니까 오늘은 가지 말라면서 허리를 안아 온다. 준식은 대답하기도 싫어서 그를 수건으로 후려쳤다. 







*


일요일 아침부터 이미 더웠다. 안 그래도 불쾌지수가 높은 날씨에 컨디션은 바닥이고, 혈중 니코틴 농도도 떨어지고, 석율은 옆에서 치대기까지 하여 준식은 폭발 직전이었다. 


“컨디션 많이 나빠요?”


“묻지 마.”


“또 하면 괜찮은데.”


“미친...! 뭘 또 해.”


준식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석율은 그에게 부딪힐 뻔 했다. 그가 잘 짓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눈을 치뜨는 표정으로 석율을 노려본다. 


“싫어요?”


“됐어, 안 해. 우리 그냥 좋은 선후배로 지내요, 이 새끼야.”


짜증이 잔뜩 섞인 준식의 말에 석율은 또 빵 터져서 웃기 시작했다. 


“어, 나 지금 차인 거에요?”


“저리 가라고.”


석율은 계속 성질을 부리는 그에게 참지 못하고 귀엽다고 말했다가 또 욕을 먹었다. 오픈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알바생이 뒤이어 와서 석율에게 인사했다. 아침부터 웬일이시냐며 살갑게 던지는 관용적인 질문에 한석율과 성준식은 서로 딴 곳을 보았다. 







*


다음 날 저녁, 석율은 오래간만에 칼퇴근을 할 수 있었다. 재빨리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찾아갔으나 카페 문을 여니 준식이 늘 서 있던 자리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어...?”


깜짝 놀라 멍해진 석율에게 알바생이 인사를 했다. 


“형은 어디 갔어요?”


“먼저 가셨어요. 아프셔서.”


그는 준식이 대타로 부른 바리스타였다. 선선한 태도로 뭘 드실건지 묻는 그에게 손사레를 치고, 준식의 집으로 뛰어갔다. 전화를 해 보지만 받지 않는다. 여러 번 반복해서 걸어도 받지 않다가, 석율이 그의 집 앞까지 다 왔을 무렵이 되어서야 준식은 전화를 받았다. 


“아파요?”


- 아니. 좀.


“저 형네 집 앞인데, 올라갈게요.”


- 오지 마.


쌀쌀맞게 거절의 목소리를 들어도 석율은 이미 준식의 집 앞까지 올라와 있는데다가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다. 


“이미 왔는데.”


석율은 전화를 끊은 후, 제멋대로 도어락 비번을 눌렀으나 다 누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오지 말라니까.”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순간 자기 때문인가 걱정이 된 석율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가 아프..”


석율은 말하다 말고 멈췄다.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성준식에게서 담배냄새가 쩔어 문 밖까지 퍼질 정도로 났기 때문이었다. 


“헐... 담배 피웠어요?”


준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깐만, 아프단 게 그럼....”


그는 여전히 묵묵무답으로 식탁 위에 놓여있던 물을 마시면서 석율을 보고는, 기력이 없는 듯 다시 침대로 가서 엎어졌다. 


어떠한 심경의 변화로 한 대를 피우고 나서 갑자기 고삐가 풀린 듯 엄청나게 피워 댄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두통과 구토 증세 등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석율 역시 과거에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줄담배를 피워대다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충 짐작이 갔다. 


“뭐 좀 먹었어요?”


“아니....”


엎드린 채 웅얼거린다. 석율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은근 진지하게 삽질을 하는 그가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웃어”


“귀엽네요 진짜.”


“나 힘없으니까 좀 가라...”


그는 엎드린 채로 꺼지라는 듯 손만 휘휘 저었다. 석율은 가방을 내려 놓고 뭔가 요깃거리라도 만들까 싶어 냉장고를 열였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내부에서 발견된 오렌지주스와 달걀의 적절한 조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Posted by 마.지
,

주말이 지나고, 석율은 지속되는 야근에 무감각해진 채로 11시가 다 되어 회사를 나왔다. 늦은 장맛비가 내려 후텁지근한 습기가 공기 중에 꽉 차 있었다. 얇은 재킷이 불쾌하게 살에 달라붙는다. 준식에게 퇴근했냐고 메시지를 보냈으나 즉답이 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는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답을 잘 보내주게 되었기 때문에, 아직 문을 닫지 않았나 싶어 카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부터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문에는 closed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내리다가 만 블라인드 너머로 준식이 보였다. 평소 그의 자리가 아닌 손님용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 그 앞에는 작고 가냘픈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석율은 피가 싸늘해지는 느낌에 발을 멈췄다. 그는 자기 일터에서만은 할 일을 확실히 하는 타입이었고, 손님 앞에 절대 저렇게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다리를 꼬고 그녀를 마주하는 준식은 무슨 얘기인지 모를 말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무어라고 대답을 해 주고 있다. 


석율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세계에 앉아 있는 그를, 밖에서 격리되어 관망하는 것 같아 화가 치민다.






문이 열리고 그녀를 먼저 내보낸 준식은 불을 껐다. 걸어가는 그녀를 부른다.


“잠깐만. 늦었는데”


“알아서 갈게요.”


딱 잘라 거절하고 간다. 

잠시 그 뒷모습을 보던 그는 문을 잠그려고 하다가 석율이 와 있음을 눈치 챘다. 



“언제 왔어?”


석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산 아래 그늘진 얼굴로 그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늦었네요.”


“손님이 있어서. 너도 늦었네.”


“손님...?”


준식은 석율의 표정을 보더니, 여러 가지를 감지하고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었다. 


“일단 들어와.”





석율은 물방울이 뚝뚝 듣는 우산을 접어 문 옆에 기대 세웠다. 자리에 앉지 않고 문에 기대 선다. 준식은 석율이 늘 앉던 바 의자에 앉았다. 어중간한 분위기에 서로 말을 꺼내지 않은 채 빗소리만 들렸다. 결국 석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맞죠? 그때 그, 여자친구.”


역시나. 준식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까지 그녀에게 쌓인 원망을 있는 대로 듣고 난 후였기에 이건 이거대로 피로했다. 


“근처에 왔다가 그냥 들른 거야.”


“그래서 뭐래, 다시 만나쟤요?”


“무슨, 헤어진 게 언젠데...”


순순히 대답하던 그는 문득 불합리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내가 이걸 설명해야 돼? 넌 아예 만나고 있잖아. 전에 사귀었던 놈이랑.” 


“그 자식이랑은 그런 사이 아니....”


“난 뭐 그런 사이냐?”


준식은 석율의 말을 자르고 인상을 썼다가,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듯한 그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만날 일 없어. 연락할 일도 없고.”


석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마음속에 뿌리 깊게 열패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중에 그가 중간에 발길을 돌려 원래대로 돌아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해 왔음을 깨닫는다. 친구에게 괜찮다고 쿨한 척 말했지만 자신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석율아.”


말이 없는 자신을 재촉하듯 부르고,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가와서 고개를 기울여 안색을 살피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준식은 석율에게 손목 윗부분을 잡히고 통증에 찌푸렸다. 언젠가 그랬듯 손자국이 날 만큼 꽉 잡혔다. 뿌리치려고 하자 표정을 굳히더니,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다시 바투 잡는다.


“놔.”


“안 놔요.”


석율은 건방진 표정으로 눈을 똑바로 보며 말대꾸를 하고는 벽에 기댔던 등을 세웠다. 뒤로 물러나려는 준식의 팔을 끌어당긴다. 그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석율 자신을 향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두운 감정이 전달되기라도 하듯이, 잡힌 손 끝이 점점 차가와지며 욱신하게 저려 왔다. 


감정적인 힘겨루기에 피로해진 준식은 팔에서 힘을 뺐다. 볼을 부풀리고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석율아.”


그는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고집스럽게 힘을 준 석율의 손을 덮었다. 


“놔도 돼.”


준식은 석율의 손을 잡아 떼어낸 후, 제 손 안에 굴려 꼭 잡았다. 







한석율의 심장은 몇 번이나 그랬듯 또다시 요동쳤다. 치솟는 감정 때문에 목울대가 뻐근하게 아팠다. 그는 무작정 키스하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응해 준다. 같이 입술을 부딪히고 손으로 석율의 뺨을 감싼다. 목에 키스하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다. 그 손을 느끼고 석율은 갑자기 숨이 가빠져 그의 쇄골을 깨물었다. 


“아파!”


버럭 짜증을 낸 그는 고개를 뒤로 뺐다. 


“무는 걸 좋아해.... 진짜 개냐?”


혈기가 올라온 얼굴로 화를 내고는, 어느 새 셔츠 밑으로 들어와 등 뒤를 매만지던 석율의 손을 떼어냈다. 








*


성준식은 바 테이블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석율을 내려다보았다. 석율은 바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왼 팔을 뺨 아래 베고, 오른손으로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걸친 준식의 늘어뜨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석율이 손을 지분거리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었다. 거의 잦아드는 빗소리가 창 밖으로 또닥또닥 들렸다. 


“석율아, 12시 다 됐는데.”


그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보기 좋게 튀어나와있는 손목 뼈를 손가락 끝으로 따라 내려가던 석율은, 그의 손마디에 제 손가락을 겹쳤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방심 상태에서 입 밖에 낸다.


“손끝이 섬세하네요. 손 쓰는 일을 해서 그런가.”


“너 나 너무 좋아한다? 부담스럽게.”

 

“아 나....”


석율은 그의 말에 인상을 쓰고는 손을 탁 뿌리쳤다. 발끈하는 반응에 준식이 웃는 것을 얄밉다는 듯이 보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형네 집에 가면 안 되요?”


“와도 되지만.”


준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갈 채비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또 물까봐 싫어.”


“뭐야.”


“넌 개도 아닌 게 왜 자꾸 깨무냐.”


왜일까 본인의 마음을 곰곰이 되새겨보던 석율은 이유를 파악했다. 그가 그 순간 찡그리면서 얼굴에 핏기가 몰려 울컥 화내는 모습이.


“그럴 때 화내는 게 귀여워서.”


“미친 놈 이거.”


성준식은 진심으로 인상을 썼다. 








*


석율은 그만..! 하고 거부하는 준식에게 키스하고 혀를 빨아들여 억지로 끌어냈다. 셔츠를 쥐어뜯으며 미는 손을 비틀어 침대 위에 찍어누르고, 발버둥 치는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넣는다. 그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셔츠 단추를 풀어 목덜미부터 가슴까지 공기 중에 드러냈다. 흐릿해진 약품 흔적들에 입술을 대고 여린 살갗을 빨아들여 자주색 선명한 자국을 새긴다. 그는 밀어붙이는 서슬에 질려 얌전해졌다. 손을 떼고 눈을 마주하며 그의 것을 문지른다. 미간을 찡그린 채,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라 눈을 피하는 그는 점점 빨라지는 손길에 낮은 신음을 뱉어내며 석율의 목을 꽉 안아 온다. 




석율은 알람 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갑자기 꿈을 깬 불쾌감에 멍하니 있다가 베개에 머리를 박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억눌린 성적 욕구를 그의 무의식이 충실히 구현해주었지만, 다 누리기도 전에 현실은 출근할 시간이었다.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라는 세금, 죽음에 출근까지 하나 더해야 하는 거 아닌지 괴롭게 고찰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본인 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접촉하면서도 석율이 손대는 건 내내 불편해하던 성준식이 이제는 같이 손을 내밀어 준다. 그 사실에 중학생도 아닌데 꿈까지 꿀 만큼 동요한 석율은 다시 그의 얼굴을 보러 가고 싶어 가슴이 뛰었지만 그 날도, 그 다음날도 야근의 연속이었다. 바빠진 이후로는 예전처럼 동기들과 외부로 점심을 먹으러 나와 은근슬쩍 들러 볼 수도 없었다. 부서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고는 빠져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며칠 내내 준식에게 메시지로 그 날의 근황을 보고하고 답문을 받는 게 그와의 유일한 접점이었다. 





주말이 되어서도 일상의 끄트머리가 여전히 따라붙어 온다. 석율은 러시아어학원에 갔다가 끝나자마자 뛰쳐나와서야 비로소 그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적은 주말이니까 한가하게 얘기라도 해 볼까 했는데 석율의 예상과 달리 카페는 꽉 차 있었고, 알바생과 준식 둘이서 커버하기 벅차 보였다. 석율의 자리에만 소품이 올려져서 딱 하나 비워져 있었다. 예상 밖의 풍경에 놀란 그는 준식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아. 어서와.”


준식은 소품을 치워 주며 빠르게 인사를 하고는, 주문을 가져다주러 갔다. 알바생이 작은 소리로 가르쳐준다. 


“무슨 블로그에 나왔대요.”


분명히 좋은 일은 맞는데,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얘기할 시간조차 없는 게 섭섭했다. 석율은 얌전히 앉아 사람이 좀 빠지기를 기다렸다.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비로소 좀 한가해졌다. 그 동안 석율은 들고 온 책을 펴서 원치 않는 러시아어 공부에 전념했다. 겨우 한 숨 돌리는 준식에게 비로소 말을 걸어 본다. 


“빡세네요. 아르바이트 하나 더 뽑으면 안 되나?”


“그러고 싶은데. 손익 따져 보면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야.”


“그럼 노동 강도가 장난이 아닌데요.”


“다 그렇지.”


“주말에도 볼 수가 없잖아요.”


그의 불평에 준식은 픽 웃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이럴 때에는 석율이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림을 실감한다. 


“여름휴가는 없어요?”


“아직 안 정했는데. 넌?”


“신입이니까 언감생심.”


석율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우울해졌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현실은 팍팍하기 짝이 없었다. 


“만날 시간이 없다... 끝나고 술 한잔 하러 갈래요?”


“피곤해.”


“그럼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그럴까.”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던져 봤던 석율은 그의 반응에 놀랐다. 








*


씻고 나온 석율은 먼저 씻고 어느 새 티비 앞 소파에 누워 있는 준식을 보고 어이없는 심정이 되었다. 키는 비슷했지만, 준식이 석율보다 좀 말랐기 때문에 옷이 품이 컸다. 바지가 위로 슬슬 말려올라가 발목과 그 위까지 드러났다. 헐렁한 티셔츠 목 아래로 속이 들여다보인다. 그의 눈은 가물가물 감기고 있었다. 석율은 리모컨을 집어들고 티비를 껐다.


“뭐 맨날 누워요.”


그것도 내 앞에서, 긴장도 안 하고. 석율은 속으로 불평을 했다. 


“졸려....”


“옷은 또 왜 그렇게 입고”


그의 잔소리에도 미동없이 누워 슬슬 잠이 든다. 석율은 위에서 그를 덮쳐 안았다. 


“안 일어나면 뽀뽀해 버린다.”


석율의 협박을 들은 준식은 눈을 감은 채로 그의 머리 뒤에 손을 넣고 끌어당겨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후 손을 놓았다. 역으로 놀라서 굳었던 석율이 정신을 차리자, 그는 이미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헐......자요?”


그의 위에 몸무게를 싣고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당겨 안아도, 쇄골에 키스하고 핥아도 계속 잔다. 


“아 이 아저씨가... 이래도 잘 거야?”


막 잠이 들었던 준식은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손길을 느끼고 눈을 조금 떴다. 인상을 쓴다.


“하지 마.”


석율은 발로 밀어내는 준식을 피해 그를 다시 안았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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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식은 콜택시회사의 ARS로 현재 근처에 가능한 택시가 없다는 멘트를 들었다. 그러니까 자기 집으로 오라고 장난스럽게 다시 권했던 석율은 막상 준식이 그러자고 승낙하자 오히려 난처해졌다. 


그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며, 석율은 설레발치는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여전히 석율 쪽에서 손대는 걸 꺼려하는 그에게 집에 가는 것이 당연히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급작스레 말을 않는 석율을 보고 준식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말을 안 해? 무슨 생각하길래.” 


어느 새 멘탈을 회복했는지 역으로 놀린다. 발끈한 석율이 받아쳤다. 


“뭐, 무슨 생각 하는지 말해줘요?”


엘리베이터 안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두 사람은 좀 서먹하게 현관에 들어섰으나, 막상 들어와 벽시계를 보자 모든 걸 떠나서 불과 몇 시간 후엔 일하러 가야 한다는 직장인다운 압박감을 먼저 느꼈다. 


“몇 시에 일어나?”


“일곱시 반쯤...?”


그의 말을 들은 준식은 휴대폰으로 알람을 맞춰 소파 옆 협탁에 올려놓았다. 석율은 무겁고 미지근한 공기를 밀어내려고 에어컨을 켰다. 


준식은 예전부터 석율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었으나, 그의 집에 와 본 적은 없었다. 석율이 복층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사적인 그의 공간을 호기심을 가지고 돌아본다. 그의 오피스텔은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책이 많았다.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영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듯, 싱크대와 식탁은 사용한 흔적이 별로 없다. 


책장 윗 칸 앞에 계절에 맞지 않는 겨울장갑이 놓여 있다. 무심코 들여다 본 준식은 자신이 줬던 것임을 알았다. 







석율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조금 어색해 하면서 말을 꺼낸다.


“어... 위에 침대에서 자요.”


“됐어. 이불만 줘.”


준식은 석율이 이불을 가져오는 동안 손발을 씻으러 갔다. 석율은 칫솔이 욕실 장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석율이 씻고 나와 보니 준식은 2인용 소파에 몸을 구겨 넣고 이미 잠들어 있었다. 에어컨을 좀 세게 틀어놓았더니 추운지 이불을 말고 모로 누워 머리칼만 보인다. 석율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과거에는 열 받게 하는 존재였는데-물론 지금도 열 받을 때는 많지만-지금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사람의 감정이란 참 희한한 것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답답하게 얼굴을 덮은 이불자락을 내려 주었다. 이마에 덮인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귀에 키스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걸 깨닫고 곧 손을 떼고 올라갔다.



석율이 올라가고 불이 꺼지자마자 준식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다시 감았다 뜬다.






*


몇 시간 후 크게 울리는 알람에 준식은 잠에서 깨어났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손을 뻗어 휴대폰 알람을 끄고, 버릇처럼 머리맡에서 니코틴 패치 상자를 더듬어 찾았다가 없다는 걸 생각해 낸다. 일어나 보니 석율은 어디를 갔는지 없었다. 초조함과 함께 약간의 두통이 몰려와서 그는 인상을 잔뜩 썼다. 민트 치약으로 양치를 해 봐도 가라앉지 않는다. 식탁 위 커피메이커에 이미 내려져 있는 커피를 마셔도 그랬다. 심지어 커피도 맛이 없었다.


“하아.....”


그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문지르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 일어났네요.”


신발을 벗으며 들어온 석율은 아침을 사 온 듯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어느 새 일어나서 준비를 다 했는지 말끔하다. 다가온 그에게서 스킨냄새와 섞여 담배냄새가 났다. 준식은 식탁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채 석율을 말없이 빤히 보았다. 



석율은 온통 하늘로 곤두선 준식의 머리카락과 심기 불편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머리가 왜 이래요?”


석율은 머리를 넘겨주면서도 준식이 자기 손을 쳐낼까 싶어 약간 주저했으나, 예상 외로 그는 가만히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석율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손가락이 이마를 지나 떨어지자,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응시해 왔다. 


그의 손가락이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석율은 흠칫 했다. 이어서 입술이 와 닿았다. 


입술 끝부터 서서히 맞대어 맞물리게 키스한 그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입술을 비벼 왔다. 숨이 가빠져 열린 석율의 입술 사이로 들어와 그의 혓바닥을 빨고, 혀 아래 부드러운 부분을 핥아 올린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나서 그가 떨어지는 순간, 석율은 다리가 풀릴 뻔 했다.


소리가 들릴 만큼 맥박이 격하게 뛴다. 준식의 말을 잊고 그를 안으려던 석율은 역시나 허망하게 떠밀리고 나서 어깨를 눌려서 식탁 앞에 억지로 앉았다. 


“으악...!”


석율은 식탁에 머리를 박고 몸부림을 치고 나서 시뻘개진 얼굴을 들어 성준식을 노려보았다. 아침부터 이래놓고 정작 본인은 태연히 석율이 떨어뜨린 봉투를 주워서 안에 든 걸 꺼내 놓고 있다. 이전과 달리,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행동에 부연설명을 달지 않았다. 커피메이커 안의 커피를 버려버리고는 필터를 드리퍼 삼아 새로 커피를 내려 준다. 


“빨리 해. 8시다.”


손목시계를 보며 재촉한다. 







*


시간으로만 따지면, 바쁘게 일하고 생활하고 잠드는 한석율의 일상 속에서 성준식과의 만남은 아주 작은 접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서적인 밀도는 달랐다. 일할 때의 자신은 특정한 상황에만 생각을 집중할 뿐 나머지는 머릿속에 이미 넣어진 프로그램이 가동되듯 거의 무의식적으로 정해진 관행을 따라 재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해 나간다. 반면, 준식을 만날 때의 자신은 온전히 그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판례가 아무것도 없이 날 것으로 던져진 상황을 앞에 놓고 고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스트레스이지만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스트레스였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분명히, 남의 말을 그대로 잘 듣는 타입이 아니었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얌전히 손을 내리고 기다렸다. 그가 지척까지 다가오고 눈을 피하지 않을 때까지. 




불현듯 성준식을 만나러 가고 싶어진 석율은 팀 분위기를 살폈으나 도저히 야근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주말에 찾아가서 준식이 일하면서 움직이는 몸짓을 하루 종일 빤히 보고 있을까 하는 스토커같은 생각에 빠진 그를, 어젠 잘 들어갔냐는 친구의 메시지가 깨웠다. 그는 슬쩍 휴대폰을 가지고 탕비실로 나왔다. 



“뭐냐. 넌 왜 그렇게 갔어?”


몇 초간 침묵하다가 대답한다. 


- 야... 그 새끼 성깔 있더라.


“밤에 불러낸 게 잘못이지. 그리고 그 새끼라고 하지 마.


- 내 맘이야. 난 발 걸치는 새끼들 싫다고.


“네 맘대로 싫어하시고요. 하여간 참견하지 마, 앞으로”


- 이젠 할 생각도 없다. 


포기한다는 듯 혀를 차면서 말한다. 석율은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제 준식이 친구놈에게 성질을 부렸었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 정도면 양호했던 것 같아 의아했다. 






그 날도, 또 금요일인 그 다음날까지도 야근 확정이었다. 금요일 저녁, 석율은 퇴근시간 직전에 사수로부터 일을 잔뜩 넘겨받았다. 


“이걸.. 제가 다요?”


“부탁 좀 하자. 다 하면 메일로 그쪽에 보내고. 이건 선물.”


어깨를 토닥토닥 치며 떠넘긴다. 자신은 가정이 있지 않냐며 자유로운 네가 고생 좀 하라는 말에 석율은 썩소를 지었다. 짬이 낮은 자신에겐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선물이라며 내민 봉투를 받아서 열어보니 동료들이 야근하고 새벽에 끝날 때 자주 가는 인근 사우나 할인권이었다. 즉, 일의 양이 새벽에나 끝날 것이란 얘기였다.


‘아오....’


석율은 치솟는 빡침을 누르는 한편, 저 사람들은 이 와중에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한 여름 밤의 뜨거운 공기가 퇴근하는 순간부터 준식을 덮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에어컨을 틀고 씻은 후, 음악을 틀고 식탁에 앉아 자료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커피를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나 막상 운영을 해 보니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신경 쓸 요소가 훨씬 더 많았다. 메뉴 선정을 다시 하고 케익류를 아예 빼버릴까, 아님 그가 가장 싫어하는 파르페를 빼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매출을 들여다보다가 알림 소리에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퇴근했죠? 전 아직도 야근 ㅜㅜ’


한석율이었다. 





실제로는 빠릿하게 일을 하면서도 메시지로는 새벽에나 끝날 것 같다, 심지어 사우나 표까지 받았다며 징징거렸던 석율은 숫자 여섯 개만 찍힌 암호 같은 답문을 받았다. 벙찐 그의 황당함을 해소시켜 주듯 연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온다.


‘우리 집으로 와.’



숫자가 그의 집 도어락 비번임을 알아챘다. 석율은 또다시 얼굴이 빨개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고, 다시 일어나서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비번을 알려주는 거 보면 말 그대로 난 먼저 잘 테니 넌 알아서 들어오고 알아서 자라는 얘기인데도, 언제나 이렇게 의식해버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산란한 정신을 달래려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들이킨 석율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


새벽 4시가 좀 넘은 시간,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사무실에서 겨우 일을 끝낸 석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수를 하고 목을 이리 저리 꺾어 굳은 어깨를 푼다. 야간 경비에게 수고하시라고 인사를 하고 나오니 하늘 한 구석에 벌써 희미하게 빛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초새벽인데도 그닥 식지 않은 텁텁한 공기 속을 걸었다. 


준식의 집 문 앞에 도착하여 도어락을 열었다. 에어컨 때문에 안은 서늘했다. 석율은 현관등에 의지하여 식탁까지 가서는 겉옷을 벗어 가방과 함께 의자에 내려놓았다. 시계를 풀어 올려 놓고 돌아본다. 낮은 숨소리를 내면서, 성준식은 옆으로 누운 채 자고 있었다. 현관등이 꺼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짙은 청색의 희미한 새벽빛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그를 내려다 본다. 규칙적이고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던 석율은 침대에 앉았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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