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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님 썰-01

짧은 망상 2016. 7. 24. 19:37
술 한 잔 할래. 라는 말은 권유가 아니다. 업무 시간이 끝났다고 업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성준식도 그런 류의 잔업 중이었다. 그는 선배 및 동기들과 라이브 바에 앉아, 하품을 억지로 누르며 땅콩을 까서 입에 넣었다. 앞으로 탈 라인 그 자체인 선배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잘 해야 했다. 그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척 몸을 앞으로 기댔다.

“그런데 웬 라이브? 박 과장 이런 취향이야?”
“여기 화요일 목요일에만 오는 가수가 있는데, 걔 팬이거든.”
“얼~ 박 과장 올해 장가가나?”
“아니야. 그게, 여자가 아니고 여장한 남잔데, 노래를 되게 잘하는 건 아닌데……. 뭐, 묘하게 매력이 있어.”

준식은 남 몰래 인상을 쓰며 어금니로 땅콩을 물어 부쉈다.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에 다른 일행들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우~ 선배 게입니까? 형수님 아니고 형님 생기나요?”
“아냐 임마!”

와르르 웃어대는 소리는 갑자기 사그라졌다. 무대 뒤편에서 기타를 들고 나타난 사람 때문이었다. 얼핏 상당히 예뻐 보이지만, 짧은 원피스 아래로 첫눈에도 여성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몸 선이 드러난다. 준식의 일행이 일제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마주 본다. 강아지처럼 검은자가 큰 맑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준식은 흠칫 놀랐다. 깜빡,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한 눈은 곧 다른 곳을 향했다. 노랫소리는 굳이 꾸미지 않은 남자 그 자체였다. 뛰어난 보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준식은 선배가 왜 팬이라고 자처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힘 있는 목소리임에도 끝부분은 나약한 느낌을 주며 데크레센도되고, 들숨이 노래로 전부 치환된 후 잠시의 순간 얼굴에 깃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눈을 사로잡았다. 뻔한 가공 초콜릿을 씹었는데 안쪽에서 갑자기 씁쓸한 위스키가 튀어나온 것처럼, 그리고 그 맛은 한참을 손대지 않아 굳어 있던 머릿속 어딘가를 헤집었다. 아득하게 어둠 속에 가라앉아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술렁거렸다. 불안한 듯도, 설레는 듯도 한 어떤 감정과 기시감. 연달아 두 곡 노래가 끝나자 그 실체 없는 감정도 따라 자취를 감췄다. 그의 일행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준식은 손바닥을 몇 번 소리나게 마주치며, 어둠 속에 묻힌 기억의 끄트머리를 소득 없이 더듬었다.

 *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둔 7월은 응당 즐거워야 하지만 기말고사가 먼저였다. 야간자율학습이 막 시작될 시간, 준식은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아무도 없는 별관으로 향했다. 창문으로 붉은 석양빛이 들어와 복도 바닥에 주황색 네모 패턴을 만들었다. 하나 둘 셋, 검은 부분 밟으면 죽음. 준식은 늘어선 빛덩어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본관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운동장에선 구령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기타 소리도. 환청처럼 아득하던 그 소리는 발걸음을 옮길수록 더 크게 들렸다. 조금 열린 기타 동아리실 문 사이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G-B-C-Cm, 반복되는 코드와 함께 나지막한 허밍이 들린다. 준식은 저도 모르게 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둑어둑한 안쪽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저무는 빛이 그의 왼쪽 뺨에 내려앉아 얼굴 반쪽을 붉게 물들인다. 나머지 얼굴 반은 푸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미술 시간에 배웠던 입체파 그림 같은 그 얼굴은 준식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후배, 한석율.그는 남자학교인 이 곳에서 선배에게 고백했다는 흔치 않은 이유로 유명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낮은 허밍은 나약하게 들렸다. 손가락 끝이 코드를 꾹꾹 누른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갔던 준식은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낡은 문 때문에 흠칫 놀랐다. 기타를 치던 손 역시 놀란 듯 멈칫한다. 다른 빛으로 반씩 나누어졌던 얼굴이 들린다.

*

첫 방문 이틀 후, 준식은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그 곳을 다시 찾았다. 벌쭘하게 2인석에 혼자 앉아 다리를 떨던 그는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고 밴드가 준비에 들어가자 몸을 바로 했다. 준식은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한 순간 눈이 마주치자 센 척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술렁거린다.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분명 저런 족속에 거부감이 있을 텐데도 드물게 예뻐서일까 아님 다른 이유에서일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회사 생활 몇 년이 지나면 사람은 굳는다. 보드랍던 빵 껍질이 공기 중에서 굳어지듯이. 방어적으로 움츠린 어깨는 그대로 고정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억누르던 감정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변한다. 그녀, 또는 그의 존재에는 그렇게 두꺼워진 표피를 뚫고 들어오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준식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테이블 아래에서 박수를 치고, 미지근해진 술을 넘겼다. 오는 날이 언제언제랬지. 화요일, 목요일. 입 안으로 중얼거린다.

*

- 근데 한석율이 좋아한다고 했대! 아 소름.
- 느갬. 구라 까지 마.
- 아 진짜라고 시발아. 서로 대딸만 쳤는데 삘받아서 고백했대 막.
- 대딸받다 후장 털릴 뻔.

그 주제는 석식 먹는 짧은 시간에 가볍게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정도의 것이었다. 소문의 당사자가 죽을만큼 괴로울지는 몰라도 만사가 심심한 그들에겐 그저 그런 반찬거리. 준식은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이며 멀건 카레에서 당근을 골라냈다. 우울해 보이던 눈동자,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얼른 사과하던 움츠러든 표정을 떠올린다. 낮은 허밍 소리도.석식 후 짧은 휴식 시간은 농구를 하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쉬운 유희거리를 찾아 오늘 화제에 오른 문제의 ‘한석율’을 구경하러 갔다. 무리에서 튀고 싶지 않았던 준식도 적당히 휩쓸려 따라 갔다. 그들은 교칙을 어기고 1학년 층으로 가 뒷문으로 안쪽을 기웃거렸다. 한석율은 교실 맨 뒤 창가에 홀로 앉아 있었다.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쓴 흰 얼굴은 준식이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얼굴은 좀 봐줄 만 한데.”
"저게? 시력 빠개졌냐."
"니보단 나음. 평타 이상인데?"

한석율은 찾아와서 구경하고 야지 놓는 인간들에게는 이제 익숙한 듯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책을 들여다본다.

“야, 한석율? 외모 평타 이상 치면 박게 해주냐?”
“야 시발ㅋㅋㅋㅋ이새끼도 께이새끼 아냐. ”
“엠창 아니거든? 냄새 안 나게 생겨갖고 이쁘잖아.”
"야, 쌩까네?"

준식의 무리 중 하나가 집어던진 팩우유 빈 곽이 석율의 머리에 정확히 가서 맞았다. 탁, 속이 빈 소리가 나고 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한석율은 모른 척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며 안경을 벗자 안광이 번득이는 눈망울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준식은 몇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못 박아요, 선배님. 외모가 하타치셔서."
"뭐, 뭐라고?"
"존나 좆같이 생겨서 못 박는다고. 좆같은 병신새끼야."
"이새끼가 돌았나!"

덩치가 큰 준식의 급우는 석율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너 나보고 박고 싶다고 했냐? 드러운 게이새끼는 너네."
"이 씹!"

석율을 내동댕이친 그는 가슴께를 발뒤꿈치로 찍기 시작했다. 석율이 몸을 웅크려 방어하는 사이, 나름대로 생기부 관리와 수시에 뜻이 있는 나머지 무리는 준식처럼 슬슬 물러나기 시작했다.

"야, 야 하지마... 생활부 끌려 감."
"이 시발년아!"

준식은 팔짱을 끼고 좀 떨어져 벽에 기댄 채 미간을 찌푸렸다. 욕설과 무작스럽게 퍽퍽 밟는 소리가 거슬렸다. 석식을 먹고 돌아온 1학년들이 주변을 기웃거리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고만 하라고. 종 친다 가자."

그들은 씩씩거리는 놈을 뒤에서 잡아 끌었다. 못 이긴 척 물러나 계단으로 내려가는 동안, 준식은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석율을 보았다. 석율은 격하게 기침을 하며 일어나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피가 떨어진 셔츠 칼라를 보며 혀를 차고 눈을 든다. 준식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랐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증오, 자기 모멸, 준식으로서는 모를 어두운 감정들. 한참 그를 보던 석율은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준식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수치스러웠다. 그는 실내화 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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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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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0214

짧은 망상 2016. 2. 15. 00:19

살다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던 돌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이 온다. 비웃던 행동들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도. 늘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살아온 한석율도 최근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찌질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의 집 앞에서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만나달라고 떼를 쓰며, 끝까지 나오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는 행동들. 받지 않는 전화를 무한히 걸어 상대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 자기혐오가 석율을 덮쳤다. 동시에 상대에 대한 원망도 끓어올랐다. 아무리 걸어도 성준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분명히 실내에는 불이 켜져 있고 사람 그림자가 보임에도 그랬다. 석율은 창을 올려다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또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아, 받으라고.”

 

듣는 사람 없는 공허한 명령을 던져 본다.

 

진동은 멈췄다 싶으면 다시 시작되고, 또 시작되고 했다. 배터리가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염증이 난 준식은 전원을 꺼버릴까 싶어 폰을 집어 들었다가 그만 소파에 던져 버렸다. 화면에 찍힌 부재중 전화 52통이 지긋지긋했다.

 

*

 

우리 그만 헤어지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성준식은 이별을 고했다. 석율은 눈을 홉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준식의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내일 아침에 만나시죠.”

장난하는 거 아니야. 끝내자고.”

 

환한 미소가 빛 바래고 얼굴이 어두워지는 과정은 슬로 모션 같았다. 석율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방금 들은 말을 부인하듯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무슨 소리에요.”

또 말해줘?”

갑자기 왜...”

아무래도 이건 정상이 아니야.”

??”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준식은 눈썹을 찌푸렸다.

 

목소리 낮춰.”

그게 무슨...! , . 말이 안 나온다. 그걸 지금 이유라고?”

그게 이유가 아니면 뭐가 이유가 돼. 목소리 낮추라니까.”

 

준식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덧붙였다.

 

난 승진할 거고, 해외에도 갈 거야. 어차피 흙수저 월급쟁이 신세인데 위로 올라라도 가 볼 거라고. 그러려면 부인하고 가정이 필요해.”

...”

 

석율은 기가 막힌 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물론 널 좋아는 하지만, 석율아, 이게 언제까지 가겠니. 막말로 결혼을 할 거야 백년해로를 할 거야? 이 정도 했으면 직성이 풀릴 때도 됐잖아.”

 

한 모금 더 삼킨 와인이 꼴깍 소리를 내며 준식의 목구멍을 넘어갔다. 석율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굳었고, 늘 따뜻한 빛을 품고 웃던 눈도 깊게 가라앉아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었다.

 

내 말 이해하겠어?”

 

주차 어디다 했어? 같은 내용에 어울리는 너무나 예사로운 말투였다. 석율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말없이 자기 짐을 챙기고, 카운터에서 제 회색 코트를 받아 걸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

 

미래에 뭐가 더 있다고 이래. 성준식은 끊어지지 않는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한석율은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견원지간일 때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의외로 잘 맞았다. 석율은 눈치가 빠르고 농담할 때 자신과 코드도 통했으며, 관계할 때에도 연하의 후배답게 배려가 있었다. 술김에 충동적으로 시작된 관계가 이만큼이나 지속된 것도 그 탓이었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준식은 사회의 한 부분에 안착하여 살 계획이었다. 기왕이면 중산층으로 안착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싶었다. 남들과 다른 것, 무언가 투쟁하여 이겨내야 할 것은 피곤하고 싫었다. 쉬운 길이 있다면 굳이 어려운 길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몸을 섞고 친밀하게 지낸 상대가 형편없이 상처 입은 걸 보는 것은 아무리 제 위주인 준식으로서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석율은 화를 냈고, 그 다음에는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렸고, 집착적으로 대화를 갈구했지만 성준식에겐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냥 그게 다였기 때문에 밀쳐내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밸런타인데이 저녁이었고, 새로 소개팅해서 만난 그녀와의 약속을 앞두고 있었지만 석율이 끈질기게 전화를 해 대는통에 카톡 확인조차 여의치 않았다. 짜증이 치솟은 준식은 욕설을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작 좀 해! 어쩌라고!”

“저기, 성준식씨 휴대폰 맞나요?”

가녀린 목소리가 당황한다.

, 주영씨. 죄송합니다. 보이스 피싱전화가 자꾸 와서.”

 

준식은 급히 얼버무리며 의자에 걸쳐 두었던 윗옷을 집어들고 선물도 챙겼다. 어디어디로 데리러 가겠노라는 약속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석율의 이름이 뜨고 전화가 온다. 그는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폰을 꺼 버렸다.

 

 

*

 

차를 빼던 준식은 기겁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1센티 간격으로 간신히 사람을 치지 않았다. 야 이 미친놈아 소리치려고 보니 석율이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차 앞에 선 모습은 좀 섬뜩했다. 말 꺼내기도 싫어져서 비키라고 경적을 울렸으나, 석율은 오히려 보닛에 두 손을 짚고 몸을 기대섰다. 준식은 창문을 내리고 머리를 내밀었다.

 

안 비켜? 너 진짜 왜 이래?”

어디 가십니까.”

알 바 아니잖아.”

그 분 만나러 가십니까, 그 소개팅? 기념일 그렇게 잘 챙기시는 줄 몰랐지 말입니다.”

알면서 왜 물어봐. 비켜, 형 늦었다.”

싫어요.”

아오!!”

 

준식은 운전대에 엎드렸다. 내가 어쩌다 저딴 거랑 시작을 해서 이 지랄을 하고. 그가 머리를 쥐어뜯는 그 짧은 순간에 다가온 석율은 열린 창 안으로 손을 넣어 운전석 문을 열었다. 준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석율의 표정은 너무 굳어서 인형같이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튼을 눌러 조수석 잠금장치를 연 후, 운전석 쪽 문은 열어 놓은 채 반대쪽으로 돌아와 옆자리에 탔다. 그 사이 준식이 문을 잠가 버리고 도망칠 것을 예상한 행동이었다. 성준식은 그만큼이나 뻔뻔하고 봐 주는 게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왜 타. 어쩌자고.”

 

화를 내려던 준식은 뒷차가 울려대는 경적 소리를 듣고 일단 차를 주차장 구석에 댔다. 약속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준식은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느라 혀를 차고 입술을 씹었으며 석율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석율아.”

가지 마.”

 

대놓고 반말지거리를 한다.

 

?”

 

석율은 몸을 돌려 준식을 똑바로 보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물기와 분노를 품고 일렁거렸다.

 

성준식, 당신 그렇게 가장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사람 책임질 줄도 모르고, 받는 데만 소질 있잖아? , 무슨, 누굴 만나서 어떻게 할 건데?”

 

준식은 기가 막혀서 웃음을 터뜨렸고, 정색하며 마주 노려보았다.

 

글쎄, 그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당신? 이제 막 나가기로 했어?

아닙니다, 선배님. 그런데요, 성준식 당신 받아 줄 사람은 나 정도라고. 그렇게 자신을 몰라?”

야!"

"그렇게 모르니까 이러겠지."

 

석율은 손을 뻗어 시동을 끄고 키를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울컥 화를 터뜨리려는 준식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챘고, 놀라서 몰아쉬는 숨소리를 제 입 안으로 삼켰다. 목 아래 단추가 하나 튕겨 어디론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굳어진 혀를 억지로 빨아 당겼던 석율은 입을 떼고, 제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동자는 비정상적으로 번들거렸다

 

초콜렛 받으러 가려고? 포기하시죠.”

“.......”

 

석율은 하얗게 질린 채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준식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뒤이어 그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원래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렛 나부랭이나 받는 날이 아니지 말입니다. 그럼 무슨 날이냐.”

“...그만해.”

새들이 첫 교미하는 날. 알겠어? 원초적인 날이라고.”

 

석율의 무릎이 다리 사이를 찍어 눌렀다. 단추가 없어져 벌어지는 칼라 사이로 미지근한 입김이 훅 끼쳤다. 


준식은 맨 살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에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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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02  (2) 2015.09.30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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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성분 2

2015. 11. 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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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성분 - 01

짧은 망상 2015. 11. 25. 13:37


석율은 낡은 가죽 소파 팔걸이를 의미 없이 쓰다듬었다. 몇 번을 와도 적응되지 않는 장소였다. 오래된 먼지 냄새가 감돌았고 평소에 자주 쓰이지 않는 공간다운 냉기가 실내에 감돌고 있었다. 종로구의 40년된 낡은 4층짜리 빌딩 꼭대기의 간호학원 간판 안쪽은 사실 학원이 아니었다. 국정원 산하의 비밀 기관인 이형능력자관리국, 줄여서 이능국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안정을 위협할 만한 사람들을 국정원에서는 따로 분류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그 수는 횡으로도 많지 않았고, 종으로 쳐도 긴 시간에 걸쳐 드문드문 출현한 탓에 존재감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관리는 필요했다. 능력의 종류는 제각각일지라도 그 소유자들에게는 공통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버려두면 반드시 사건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낌새가 보이며, 사춘기 때 폭발적으로 강해진다. 그리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광증을 보인다. 초인적인 능력이 강한 스트레스를 동반해서이거나, 적어도 뇌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했다. 청년기를 지나 30 전후가 되면 광증은 절정에 달한다. 그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대량 살인을 하거나, 대중 앞에서 화려하게 자살을 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생시키는 등 현실에 기반을 둔 대중의 인식 세계에 혼란을 일으켰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능국에서는 이런 능력자들을 섬에 격리된 정신병원에 가두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튀는 능력들 사이에서 튀지 않는 능력자가 발견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능력자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능력자. 소위 유도자’. 첫 유도자는 스스로도 제 능력을 몰랐지만 능력자들 제어에 뛰어난 성과를 발휘한 이능국 직원이었다. 통제 불능일 줄 알았던 능력자들이 제어될 수 있음이 알려지자 국에서는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더 찾아내려고 애썼다. 사회 안전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역으로 이용할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비과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과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면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모으고 가설을 세워 증명하고 난 후 정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근 몇십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능력자유도자사이에 밝혀진 몇 가지의 법칙은 제도화되었으며, 시스템은 안정되었다.

 

석율은 국장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유도자 출신인 그는 대단히 피곤해 보였고,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앉아 봐.”

 

가타부타 인사도 없이 앉으라고 손짓한 후 석율 쪽은 보지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것 좀 봐봐.”

 

석율은 그가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꽤 두툼했고, 정신과 소견서부터 사건경위서까지 여러 가지가 첨부되어 있는 걸 보니 사고뭉치 같았다. 잡다한 첨부서류를 넘기고 나자, 아래에 원래 신상이 드러났다.

 

성준식. 32세 남자.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 능력.... 정신측정? 이거, 싸이코메트리에요?”

. 한 대 피울래?”

 

석율은 고개를 젓고 서류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자신 이전의 유도자들이 남긴 의견서를 넘겨 본다.

- 제어가 너무 힘듦.

- 접촉을 극도로 거부하고 소통이 되지 않음.

- 양심이나 도덕에 대한 인식이 낮고 자기 위주.

- 능력을 역으로 이용해서 과거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 유도자에게 쇼크를 줌.

 

“...저보고 하란 말씀이십니까?”

네가 잘 맞춰 주잖아.”

그럼 전 뭐 해주실 건데요.”

월급 주잖니.”

정규직 채용해주세요. 4대보험도 안되면서.”

, 정식 예산편성에 우리 국은 못 들어가는 거 알잖아~ 공무원 채용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럼 활동비라도 올려줘요.”

석율아.”

안 그러면 안 해.”

, 새끼...”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리는 석율을 보고, 국장은 인상을 쓰며 담배를 빨아댔지만 딱히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성준식과 관련된 파일이 담긴 USB를 석율에게 내밀었다.

 

*

 

준식은 이불에 감싸인 채 누워 있었다. 주말이었지만 어디에도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접촉을 굉장히 싫어했다. 각종 사물들이 담고 있는 담담한 이야기는 견딜 만 했지만,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갖 악의, 욕정, ‘,,를 담고 있는 외침들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신과 갈등을 빚은 유도자가 떠나고 나자 단상들은 사방에서 낮게 진동하며 머릿속에 와서 꽂히는 것 같았다. 수면제를 먹으려고 몸을 일으켰던 그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택배든 포교든 하여간 모른 척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초인종은 끈질기게 울렸고, 그가 무시하자 장난스럽게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고만해!!!”

 

더럭 화가 난 준식은 조심성 없이 문을 열었다.

 

계셨네요? 성준식씨.”

 

눈 앞에 나타난 인간은 뻔뻔하게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가운데 가리마를 타서 이마를 드러내고, 동그란 눈은 보통 사람의 눈보다 훨씬 더 번뜩거리고 물기가 어려 기묘해 보였으며, 남자같지 않게 새하얗고 티 없는 피부와 색이 진한 입술은 소년 같은 이미지였다.

 

누구.”

한석율입니다. 메시지 못 보셨어요? 우리 성준식씨 새 담당.”

 

석율은 들어오란 말 없이도 명랑하게 윙크하며 제멋대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가슴께에 와 닿는 뭔가를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뭡니까.”

나가.”

 

구두주걱이었다. 힘을 주어서 밀어 쿡 찌른다.

 

너무하시네, 문전박대. 새 담당이라니까요?”

나가라고오.”

 

석율은 앞으로 몸을 밀었지만 상대는 밀리지 않았다. 눈썹을 살짝 찌푸려 인상을 쓴 얼굴은 버석했고, 손에 든 게 진짜 칼이라도 되는 양 으르며 입을 앙다물고 어두운 눈을 치뜬다. 석율은 씩 웃었다. 예민해 보이긴 했지만 예상과 달리 귀염성이 있었다.

 

맘에 들어요.”

어쩌라고. 꺼져.”

안 꺼질 건데요.”

 

석율은 손을 들어 성준식의 뺨에 대는 시늉을 했다. 질겁하고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걸 보며 신발을 벗고 올라선다.

 

!”

못 들어오게 하면 손 댈 건데. 싫죠? 에비~.”

아 뭐 이런 또라이새끼가!”

 

짜증으로 목소리가 뒤집힌다. 석율은 목도리를 풀고 역시나 제 멋대로 식탁에 앉았다. 티셔츠에 발뒤꿈치까지 오는 추리닝 차림인 준식은 못마땅한 듯 앉지 않고 옆에서 서성거렸다.

 

손님인데 차라도 한 잔 주시죠.”

누가 손님이야.”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한석율입니다. 유도자 경력은 3년이구요.”

경력자야? 전 담당자는.”

이전에 담당했던 능력자는 사망.”

 

준식은 고개를 들었다. 가벼운 말투였다.

 

사망?”

제 탓은 아니고.”

 

석율은 일어나 제 집인 것처럼 컵을 두 개 꺼내고, 포트 스위치를 올린 후 티백을 담가 차를 우렸다.

 

남친이 있었는데, 저랑 사이를 의심해서 떠났거든요. 그렇~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믿지를 않아.”

“...그래서.”

뛰어내렸어. 거참. 남자가 뭐라고.”

네 탓 같은데?”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석율은 준식 쪽에 컵을 놔 주고 다시 자리에 앉으며 덧붙였다.

 

여친 말 못 믿고 떠난 새끼랑 그거 못 견디고 뛰어내린 애 탓이지.“

 

녹차를 홀짝 마신 석율은 제 미간 사이에 검지를 갖다 대고 허우, 인상,’ 하고 속삭였다. 준식은 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찡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고 명랑한 말투가 거슬렸다.. 자신 역시 유도자들에게서 몇 번 소시오패스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사적인 관계는 아닐지언정 같이 시간을 오래 보내고 접촉하던 파트너가 사망했다는 건 꽤 무거운 주제가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성준식씨는 전 담당자 관뒀을 때 슬펐어요? 그건 확실하게 그 쪽 탓인데.”

아니.”

 

석율은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크흑 웃음을 터트렸다. 준식은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 손을 대자 방금 석율이 나불나불 해 댔던 말들의 잔상, 머그를 딱. 내려놓는 순간의 진동, 허우, 인상. 하고 짓는 표정들의 메아리들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웅웅거리며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래서 말인데 동조화 일정은..... 머리 아파요? 두통? 생리통?”

, , 닥쳐.”

 

준식의 목소리는 짜내는 듯이 눌려 있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고 숨을 몰아쉰다. 몸에 엄청나게 힘을 주는 듯 의자가 뒤로 덜컹 밀렸다.

 

이래도 유도자 필요없어요? 힘들어보이는데.”

지겨워. 좀 내버려둬. 니들이 뭔데 남의 생활에 사사건건 간섭을... ? 막말로.”

 

두통을 억누르려고 감은 눈꺼풀 뒤로 안구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좀 위험한데.’

 

석율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상대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동조화는 하지 않았지만 유사시에는 접촉할 생각이었다.

 

막말로 내 생활을 책임져, 월급을 줘? 관리 좋아하네, 개애새끼들!”

성준식씨.”

 

뻗은 손 끝은 준식의 팔꿈치에 닿았다. 끝이 날카롭지 않은 꼬챙이로 찌른 듯한 둔탁한 통증과 함께 눈 앞이 흰 빛으로 명멸하는 듯한 착각, 머릿속을 회오리치며 휩쓰는 감각이 그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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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

7:3은 3:7

짧은 망상 2015. 10. 20. 19:47

준식은 인트라넷에 올라온 워크샵 공지를 보고 인상을 썼다. 뭔 놈의 워크샵을 또 가. 봄에 가지 않았나? 돈이 썩어 나나? 그렇게 돈이 썩어나면 16층에 캡슐커피머신이나 놔 주지. 등등은 속으로 하는 생각이고, 겉으로는 반기는 척을 해야겠기에 입꼬리를 올려 본다.

“성대리, 한석율씨, 공지 봤지?”
“예, 과장님. 기대되지 말입니다.” 

준식은 자기보다 더 잽싸게 사회적 애교를 부리는 제 부사수를 흰 눈으로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어~ 과장님. 산행이라는데요, 단풍이 끝내주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단풍 보면서 술 한잔, 죽인다! 캬~ 응?”

가족이 모두 외국에 가서 혼자인 문과장은 환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준식과 석율은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작위적으로 웃었다.

*

“기대? 입에 발린 말 참 잘해, 우리 한석율씨.”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이런 거 엄청 좋아하지 말입니다. 다 같이 퐈이팅넘치게 건배! 산행! 단체생활 캬~”
“.....”
 
준식의 생각과 달리 석율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막내 포지션도 크게 싫어하지 않았다. 바쁘게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나로 인해서 조직에 피가 돈다’ 류의 자아도취를 느끼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어진 준식은 들고 있던 A4지 뭉치를 돌돌 말아 공연히 석율의 뺨을 톡 치고, 고개를 기울이며 예쁜 척 하는 걸 흐린 눈으로 보며 그를 탕비실에 남겨놓고 나왔다.



워크샵 장소는 단풍으로 유명한 강원도 모 산의 콘도였다. 계약직인 실무직들이 없어 수가 줄었지만, 평소 같으면 퇴근하여 침대에 누워 있거나 가족과 즐겁게 보낼 시간대에 거대 연회장에 줄줄이 앉아 건배하고 환히 웃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물론, 결혼 10년차 이상인 사람들은 제외하고.

누구를 위한 회식인가 싶던 자리도 술이 돌고 연회가 점점 흐트러지면서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윗대가리들은 별도 룸으로 빠지고, 나머지들도 팀별로 슬슬 모이거나 방으로 사라져 각자 잡담과 함께 음주분위기가 되었다. 술이 오르자 팀별 모임도 섞여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자 동기 모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목말라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단정한 자세를 유지 중이지만 꽤 취한 영이가 답답한 듯 단체 티셔츠 목을 당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백기가 즉각 반응했다.

“1층 가서 사 올까요?”
“문 닫았더라구요.”
“편의점 가죠.”
“아니에요. 꽤 멀던데.”
“편의점? 그럼 난 설#임! 아 탄산수도! 과자도!”

엉덩이 들 태세였던 백기는 냉큼 끼어들어 대답하는 석율을 보고 인상을 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왜 한석율씨 아이스크림을.”
“아, 알았어. 그러지 말고, 우리 게임해서 지는 사람이 가는 걸로 하자구, 친구들, 어때?”
“무슨 게임이요?”
“당연히 대작?”
“싫습니다.”
“자기가 불리하니까.”
“그냥 끝말잇기 해요. 저, 백기씨, 석율씨 순서.”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보며 영이는 진지하게 운을 띄웠다.

“그럼 할게요. 칼륨.”
“장백기 딱! 걸렸네, 없네~.”
“륨본드.”
“뭐야. 백기씨, 전문용어 쓰기 있어?”
“드!”
“거 참 왜 소리를 지르고... 드라마.”
“마그네슘.”
“영이씨, 저 미워해요? 슘페터.”
“헉 미친! 그걸 또! 슘페터... 터...”

석율이 막히는 순간 둘은 눈을 반짝거렸다.

“10, 9, 8...”
“아니 영이씨, 이러기야? 카운트다운 갑자기 왜 생겼는데?”
“7, 6...”
“아 잠깐 잠깐마안~”

분명히 단어가 있을 텐데 술기운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을 구르며 반항하던 석율은 결국 패자가 되어 나설 수밖에 없었다.

*

편의점은 콘도에서 나와 주차장 아래 내리막길을 한참 지나 숲길로 걸어가야 있었다. 석율은 추리닝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산이라 제법 쌀쌀한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 숙여 불을 붙인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숲길 옆 바위 위에 동그마니 앉은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복슬복슬하게 부풀고, 혼자 튀게 단체 티셔츠가 아닌 새파란 티를 입고 앉아 먼 곳에 눈을 두고 있다.

“성대리님.”

준식은 석율의 목소리에 두 손을 들며 반겼다.

“썽뉼아~ 우리 썽뉼이, 왜 나왔어.”

취했구만. 괜히 아는 척 했다는 후회에 석율이 발걸음을 슬슬 물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준식은 반색하며 바위 위에서 달랑 뛰어내려 다가왔다.
 
“대리님은 왜 나와 계십니까?”
“나? 나야 뭐...”

준식은 말 끝을 흐리며 석율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은 담배를 재빨리 가져다 한 모금 피웠다.

“어디 가?”
“아이스크림 사러... 같이 가실래요?”
“갔다 와라.”

그가 손을 내젓는 걸 보고 석율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 하려고 했으나.

“아, 잠깐만.”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역시나, 하고 멈춰 섰다.

“왜요.”
“가는 김에 내 꺼도 사와.”
“뭐 사다 드려요?”
“뭐든 너 사고 싶은 걸로, 10개.”
“열 개요? ...대리님도 벌칙으로 나오셨죠?”
“들켰네~"

준식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거렸다.

“찾아보고 있으면 그런 걸로 사와. 그런 거.”
“뭐 말씀이십니까. 비#빅? #밤바? 아님 붕어빵모양 그거?”
“우리 한석율씨 역시 눈치가 빨라.”

심부름을 맡아 심사가 뒤틀린 두 사람은 악의적으로 낄낄 웃었다.

“프흐, 가시죠.”
“아니, 너 갔다 오라고.”

물론 석율은 끝까지 웃지 못했지만.

*

석율은 오르막길을 느적거리며 올라왔다. 양 손에 봉투를 든 데다 숨이 차서 슬슬 화나는 마당에, 팔다리 편하게 늘어뜨리고 앉아 자기한테 뺏은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준식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

“사왔습니다.”
“어~ 썽뉼. 수고했어.”

봉투를 받아 들려던 준식은 석율의 가슴에 뚫어지게 시선을 두었다.

“또 왜요.”

석율은 짜증난 티를 내려다가, 긴 손가락이 티셔츠 아랫자락을 잡고 훌렁 들치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뭐 하시는!"
"섰네?"
"섰...? 아니 이거 놓으시라구요! 익!"

실제로 서울보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유두가 서서 티셔츠 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 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있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석율은 몸을 흔들어 준식의 손을 떨쳤다.

"성희롱 아닙니까?"

준식은 다 피운 꽁초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너랑 나 사이에 성희롱은 무슨."
"사귀는 사이에도 성립하지 말입니다."
"여고생처럼 왜 그래? 닳냐?"
"워우, 소름돋아. 그럴 때 진짜 아저씨 같은 거 아세요?"
"내 꺼 줘. 이거, 딸기맛."
"...."

평소처럼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석율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 포기하고, 비인기 아이스크림들 사이에 숨어 있는-원래는 자신이 먹으려고 산-요거트맛 바를 꺼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짙은 핑크색 얇은 혀 끝으로 연한 핑크색 바를 핥아 올리고, 불투명한 흰 액체가 혀 위로 녹아 내리는 것을 보고 괜히 귀가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으나, 곧 들고 옆눈으로 훔쳐 보았다. 야외에서 옷도 들침당한 마당에 망상이 그렇게 큰 죄랴 싶었다. 숲 옆 길을 차박차박 발걸음 소리만 내며 말없이 걸어올라가던 석율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준식에게 맞춰 섰다.

"에이. "

준식은 아이스크림을 다른 손에 옮겨 쥐고 탈탈 털었다. 손등에 연한 핑크색으로 방울져 녹은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있었다. 석율은 허리를 굽혀 봉투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준식의 손을 잡았다. 준식은 제 손등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핥는 숙인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일 듯 말듯 잘 생긴 눈썹이 찌푸려져 미간에 선이 가고, 예민한 피부를 지나는 혀 끝은 간질거리고, 치뜨는 눈은 건방졌다.

"...대리님."

준식은 그가 제 입가를 핥고 달콤한 맛이 남은 혀와 입 안을 맛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려뜨린 손에 들린 하드가 녹아 아스팔트에 희미한 얼룩을 만들었다.

*

"그래서, 마부장 거기서 백만원 털렸잖아."
"미친 새끼! 후환은 어쩌고?"
"존나 기억못해. 하나도 기억못한다고오~"

석율은 허세스럽게 떠드는 준식을 흐린 눈으로 보며 봉투에서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꺼내 모두에게 내밀었다. 말랑한 기분이 되어, 아이스크림만 건네고 준식과 같이 사라지려고 했는데 갔다 와 보니 어찌 된 노릇인지 대리들과 자신의 동기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입 안 뿐 아니라 몸을 팔 안에 바짝 안고 누구보다 가깝게 맞대고 싶은 욕망은 자신만의 것이었는지, 성준식은 제 동기들과의 잡담에 금방 빠져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술을 한 잔 따르러 왔던 석율은 준식에게 어깨를 잡혀 옆에 억지로 앉았다.

"야, 얘가 왜 째려보고 있냐?"

취한 준식은 울화 때문에 여즉 곤두서 있는 석율의 한 쪽 유두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성.. 성대리님."

버럭 화내려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겨우 웃으며 가슴을 가리는 석율을 보고 대리들은 낄낄 웃기 바빴다. 이미 만취해서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데다, 같은 남성이라서 경계심도 희미했다.

"나도 해 볼래, 띵동~"
"이리 와 봐, 우리 한석율씌!"

석율은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슬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본인이 오지랖이 넓은 만큼 많은 것에 관대한 그였지만 이건 좀 곤란했다. 그 때, 준식이 석율 앞을 막아섰다.

"야!!! 이것들이...! 어디서 함부로 건드려~ 남의 사수를."

취한 목소리지만 꽤 정색하고 있었다. 석율은 근본적인 원인제공자가 성준식이라는 것도 잊고 감동했다.

'웬 일로 대리님이 날...'
"만지려면 돈 내고 만져!"
"감사.... 예??!!!"

준식은 경악으로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뻐끔대는 석율을 뒤에서 안았다.

"한 번 누르는 데 만원."
"폭리 아냐?"
"만원 내지 뭐. 평소에 인사 잘 하고 일도 잘하니까."
"아니! 아니 잠깐 이건! 제 인권은요? 악!!"

석율이 발버둥치고 대리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만원씩 내는 동안, 백기는 흐린 눈으로 구석에서 탄산수를 마셨다. 영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못 도와줘서 미안합니다, 한석율씨.'

석율이 강제 띵동을 당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 사과하던 그는 강해준 대리가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제 옆에 앉는 바람에 얼른 병을 집어 들었다. 존경하는 제 직속 사수가 저런 남학교스러운 장난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강대리님, 저, 한 잔 드리겠습니다."

해준은 백기의 말에도 묵묵히 잔을 받으며 붉어진 눈매로 그를 멀거니 보다가, 갑작스레 그의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백기가 얼어붙어 있는 동안 한 번에 잔을 다 비우고 그걸 되돌렸다.

"백기씨도 한 잔 받으세요."

돌이 된 듯 굳은 백기의 뒤로 한석율이 아햐학 간지럽..! 그만하시라구여! 하고 발버둥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메아리쳐 들려 왔다.

*

"뭘 그렇게 삐지고 그러냐. 장난이잖아."
"상대방도 재미있어야 장난 아닙니까?"
"아홉, 열, 열하나. 십일만원 벌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늘 그렇듯 귓등으로 안 듣는 태도에, 석율은 길게 한숨을 쉬고 준식을 노려보았다.

"...반띵해요. 제 몸인데 저도 권리 있지 말입니다?"
"넌 재료만 제공했지, 포장해서 상품으로 만든 건 나잖아? 7:3."

아아앍.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들끓는 분노를 꾹꾹 누른 석율은 '3'을 강조하느라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내밀고 있던 손목을 낚아채 품에 당겨 안고, 가는 몸을 덮쳐 눌렀다.

"썽뉼아, 형 피곤하니까 비켜라."
"아까 하던 거 계속 하시죠."
"싫어."

손바닥으로 뺨을 밀치던 준식은 순순히 안 밀려나는 석율에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어? 이것 봐라. 야 한석율, 싫다고."
"이것도 장난으로 쳐주세요. 장난인데 왜 그러십니까."
"꼭 따져야겠냐?"
"꼭 따져야겠는데요."

석율은 머리카락이 뭉텅 잡히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발버둥치는 몸을 누르고 파란 티셔츠를 걷어 건조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핥았다. 준식의 유두는 바짝 서 있었다.

"섰네요."
"넌 이 새끼야, 꼭 그렇게 고대로, 아, 돌려줘야 직성이..!"

유두를 혀 끝으로 자극당하는 찌릿한 느낌 때문에 붕 뜬 채 불평하던 목소리는 조심성 없이 와 닿고 혀를 물어 당기는 입술에 의해 중간에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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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대리님이 처음에 말리다가 '만지려면 돈내고 만져'라고 말하는 상황은 낮달님 ‏@rlgudeh0216 썰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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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

무제 02

2015. 9. 30.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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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은 탁요한입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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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연애 시장에서 남자 나이 32은 한창은 아니라도 여전히 유효한 나이이지만. 게이의 세계, 특히 바텀의 세계에선 사정이 달랐다. 아무리 어리고 상큼한 척 꾸며보아도 이미 표정에서 연륜이 묻어나서인지 요즘 부쩍 인기가 없어졌음을 실감하며, 성준식은 재빠르게 그 자리의 모든 인물을 스캔했다. 외모가 괜찮은 사람에겐 집중해서, 아닌 사람에겐 대충 호응하는 척 하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듯 떨떠름했다.

 

, 저는 한석율..이구요. ##대 다니고 20살이요.”

 

술을 홀짝거리던 준식은 어물거리는 말투로 갑자기 튀어나온 셀털 자기소개에 뿜을 뻔 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닌 듯 여기저기서 작은 실소가 프흡 터져나왔다. 누가 이렇게 어리숙하게 실명을 까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뿔테 안경을 쓴 고시생 스타일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 아직 통통한 볼에다, 눈동자는 진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른다. 스무살이면 원래는 대환영을 받는 나이이지만 뿔테안경-칙칙한 티셔츠-어벙벙하고 입 안으로 반쯤은 씹어 삼키는 듯한 발음 콤보는 그의 인상을 답답하고 흐릿하게 만들고 있어서, 반응은 미지근했다. 준식은 오늘도 텄네. 이제 내 나이에 이런 자리는 집어치워야겠다. 생각하고, 서로 연락처 교환하면서 자리가 흐트러지는 분위기가 될 때 잽싸게 빠져나왔다.

 

... 저기.”

?”

 

계단을 올라오던 준식은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어리숙한 실명공개 한석율이었다.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이어폰구에 꽂는 햄스터 모양의 휴대폰 악세사리였다. 준식은 구질구질 뭐가 붙어있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

 

내 거 아닌데.”

...”

왜 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왠지, 그냥, 이미지가.”

 

우물거리느라 끝을 맺지 못하는 목소리를 답답하게 듣던 준식은 입가를 찌그러트렸다.

 

나 이렇게 생겼나?”

...”

 

아오, 답답해.’

 

준식은 몇 달 전 금연해서 있지도 않은 담배를 무심코 더듬어 찾다가 때려치우고, 뭐라 한 마디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아무 말이나 꺼냈다.

 

왜 벌써 나왔어요.”

그냥. 분위기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요.”

아까 신상은 왜 깠어? 이상한 놈이 막 아웃팅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전 주변에 다 커밍아웃 했거든요.”

 

의외의 대답에 준식은 눈을 들어 한석율을 보았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자신을 빤히 뜯어보는 준식에게도 자연스럽게 한 개피 내밀었다.

 

*

두 사람은 흡연자 귀양석인 건물 측면 화단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석율은 담배에 대한 답례로 받은 맛없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주말의 번화가는 사람들로 술렁였고, 가래침을 모아 뱉는 소리와 비틀거리며 큰 소리로 주정하는 소리, 전화통화와 발걸음 소리로 어지러웠다. 그 거리에서 딱 90도만 비틀려 있는 공간일 뿐인데도,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그늘에 잠긴 채 소음으로부터 조금 물러나 있었다.

 

부모님도 다 안단 말이야? 친구들도?”

.”

와 어떻게... 이야,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요즘 애들?”

 

석율은 상대의 단어 선택에 고개를 들었다.

 

, 몇 살이세요?”

알아서 뭐하게. .”

요즘 애라시길래...”

, 너 이름 뭐랬냐?”

한석율이요.”

 

준식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커피를 홀짝이며 두 손가락으로 석율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래, 한석율아, 솔직히 말해 봐. 이런 자리 많이 나와 봤어?”

 

뿔테 안경 속에서 작게 보이는 두 눈이 잠시 망설이며 굴렀다.

 

아뇨. 처음인데요.”

역시 그렇지? 앞으로 사람 만나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은 나이를 묻지 말라고.”

왜요. 형 혹시 40 넘으시고 막 그러신 거에요?”

 

아무런 악의 없이 물었던 석율은 상대의 통통한 눈 밑 살이 접혀 올라가고, 입이 뒤집은 반원 모양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

 

그러니까 그게 틀렸다고! ~진짜. 오늘 일진.”

죄송해요.”

 

준식은 다 탄 담배를 꽉 차서 넘치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오랜만에 마시는 담배에 크흠, 하고 잔기침을 하고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석율은 안절부절 그의 옆모습을 살폈다. 건조하고 예민해 보이는 분위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석율의 눈에 띄었었다. 물론 이야기해보니 보이는 분위기와는 좀 달랐지만, 똘똘 뭉치는 듯 했다가도 어느 순간 담배연기처럼 옅게 흩어지는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말없이 커피를 삼킨 준식은 그것이 술이라도 되는 양 푸후 숨을 뱉고, 고개를 석율 쪽으로 돌려 기울였다.

 

“...주변에 밝힐 때 안 무서웠어?”

안 받아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와하아~”

 

준식은 무의미한 탄복의 감탄사를 내며, 다리를 뻗었다. 그는 주변에 자신의 성벽을 밝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위장용 여자사람친구도 있었다. 자신이 생각한 인생의 정석 루트가 있고, 그것을 차곡차곡 밟아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자신의 성벽은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어려서? 아니면 천성이? 한석율은 그에게는 놀랍기 그지 없는 존재였다.

 

형은 이름이...”

안 가르쳐 줘.”

성준식.”

 

깜짝 놀란 준식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눈은 크게 홉뜨였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아까 살짝 봤어요. 커피 계산하실 때.”

 

손가락으로 카드 긋는 시늉을 한다. 어벙해 보이는 상대는 사실 어리숙하지도 않고 성깔도 눈썰미도 있었다. 준식은 몇 번 눈을 깜빡이고, 이내 씩 웃었다. 갑자기 술 한잔 더 하자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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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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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의 꿈 (ㅋㅋㅋ)

2015. 7. 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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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A - 율식 (03)

2015. 7. 1.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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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2015. 6. 1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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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015. 6. 1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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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A - 율식 (02)

2015. 5. 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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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ㅍ님과 미도님(@dustrises, @ceremonyofaria) 두 분의 합작썰을 바탕으로 쓴 짧은 글입니다. 원래 썰은 참 재밌었는데...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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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식은 팔짱을 끼고 마지못해 설교를 듣고 있었다. 식사 잘 챙겨먹고. 연락 좀 네가 먼저 해 봐라.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어쩜 이렇게 무심한지 몰라. 등등 끝도 없는 잔소리가 이어지는 것에, 그는 신물난다는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나이에 비해 곱고, 고생이라곤 안 해 본듯 보동보동한 얼굴을 한 그의 어머니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아들의 얼굴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가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석율이 다음에 보자.”


“예 어머님 안녕히 가세요. 얼굴 뵈니 좋네요.”


“어머님은 무슨.... 지가 무슨 며느리야 뭐야.”


준식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환히 웃으며 싹싹하게 배웅하는 석율의 뒷모습을 보고 다 들리도록 투덜거리다가 핸드백으로 어깨를 두드려 맞았다. 


“아 씨..! 엄마 왜 때려!”


“왜 때려어? 너 나이 서른둘이나 먹어가지고 언제 철들래? 반말에, 뭐 엄마? 석율이 반만 닮아봐라 좀.”


째려보면서 알차게 두 대 더 친 준식의 어머니는 석율 앞에서는 돌변하여 천사처럼 웃었다. 


“우리 석율이 잘 있어~”


“안녕히 가세요.”


붙임성 있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두 손까지 애교 있게 짤래짤래 흔든다. 또 맞을까 봐 문이 닫힐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준식은 그제서야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 나. 우리 석율이랜다. 야, 썽율아. 너무 잘하는 거, 그것도 눈치 없는 거야. 적당히 하면 안 되겠냐? 나만 미움받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으며 고소해하는 표정을 보니 평소에 혹사당한 걸 이렇게 푸는 것 같았다. 


“이렇게 뒤가 구린 새낀줄도 모르고...”


석율은 준식의 말에 웃으면서 다시 일할 준비를 했다. 외면하는 아들의 옆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성준식의 어머니. 석율은 그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려 이건 오지랖이지 싶으면서도 준식에게 말을 꺼냈다. 


“잘 좀 해 드리지 그러십니까. 외로우신 것 같던데.”


“우리 엄마가 뭘 외로워. 마사지에 문화센터에, 얼마나 바쁜데.”


“그런 거 말고요.”


석율은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부모 맘을 모르시네. 자식만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잖아요.”


“네가 부모라도 돼 봤냐? 어떻게 알아.”


“저렇게 철이 없으니 어머님이...”


“야 소름끼쳐! 어머님은 무슨.”


중간에 말을 잘라버린 준식은 곧 닥쳐올 저녁타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석율은 좀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언제까지 속이실 겁니까? 좋은 분인데. 솔직히 양심에 찔려요.”


“그러니까 너무 잘해드리지 말라고.”


“근본적으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뭐면 어때. 어차피 내가 결혼할 것도 아니고. 걱정 안 하게 해드리면 됐잖아.”


컵을 하나하나 야무지게 씻어서 엎어 놓는다. 석율은 심기가 불편한 듯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보았다. 준식의 어머니는, 성관념이 프리해서 남녀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놀다가 본가와도 절연하다시피 한 아들자식이 영영 떨어져 나갈 것이 불안해서 어떻게든지 정착시켜보려고 결혼 이야기도 꺼냈을 것이다. 그런데 성준식은 거기다가 대고 자기가 더 편하게 놀고 싶다는 이유로 사귀지도 않는 석율을 구실로 들이대고 있으니. 참 사람 마음 모른다 싶으면서도, 자신도 공범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랑 사귀면 걱정 안 되신대요?”


“그렇겠지. 우리 석율이래잖아.“


석율은 행주질을 하는 준식의 옆으로 갔다. 쉬지 않는 그의 손놀림을 보며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다. 준식은 석율의 시선을 눈치 채고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평온한 자세 뭐냐. 일 안 해?”



“...그럼 정말 저랑 사귀실래요.”


석율의 어조는 차분하고 낮았다. 손을 멈춘 준식은 고개를 들었다. 석율은 말간 얼굴로 느리게 눈을 감고 다시 뜨고, 일상의 그것보다 더 짙은 눈빛으로 준식을 본다. 아직 서툰 그를 구박하며 가르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한 번도 이렇게 제대로 눈을 마주해보지 못했던 준식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석율의 낯선 느낌에 갑자기 어색해졌다. 주변을 물 흐르듯 흘러 스쳐지나가야 할 일상의 한 부분이 튀어나와 발에 걸려서 주의를 끈다. 

석율은 팔짱을 풀었다. 고개를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기울이며 한 걸음 다가온다. 준식은 숨을 들이키고, 자기도 모르게 반쯤 뒤로 물러났다. 




“어, 지금 좀 긴장했죠!”


낯선 얼굴은 곧 익숙한 미소로 온데간데없어졌다. 


“....죽을래?”


석율은 준식 특유의 빡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사장님 안 되겠네. 저한테 흑심 품고 계셨어요?”


“내가 해도해도 너한테까지 흑심 품겠냐?”


“뭐야... 제가 더 아까운데요? 착하지, 잘생겼지, 나이도 어리지.”


“나이도 어린데 실성했네.”


그의 대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석율은 여보, 어머님이 하루에 한번은 전화하래요- 따위의 상황극을 계속하다가 서릿발같이 차가운 시선을 받고 얼른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인근의 회사 퇴근 러쉬가 시작되기 직전의 짧은 망중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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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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