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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0214

짧은 망상 2016. 2. 15. 00:19

살다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던 돌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이 온다. 비웃던 행동들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도. 늘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살아온 한석율도 최근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찌질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의 집 앞에서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만나달라고 떼를 쓰며, 끝까지 나오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는 행동들. 받지 않는 전화를 무한히 걸어 상대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 자기혐오가 석율을 덮쳤다. 동시에 상대에 대한 원망도 끓어올랐다. 아무리 걸어도 성준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분명히 실내에는 불이 켜져 있고 사람 그림자가 보임에도 그랬다. 석율은 창을 올려다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또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아, 받으라고.”

 

듣는 사람 없는 공허한 명령을 던져 본다.

 

진동은 멈췄다 싶으면 다시 시작되고, 또 시작되고 했다. 배터리가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염증이 난 준식은 전원을 꺼버릴까 싶어 폰을 집어 들었다가 그만 소파에 던져 버렸다. 화면에 찍힌 부재중 전화 52통이 지긋지긋했다.

 

*

 

우리 그만 헤어지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성준식은 이별을 고했다. 석율은 눈을 홉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준식의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내일 아침에 만나시죠.”

장난하는 거 아니야. 끝내자고.”

 

환한 미소가 빛 바래고 얼굴이 어두워지는 과정은 슬로 모션 같았다. 석율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방금 들은 말을 부인하듯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무슨 소리에요.”

또 말해줘?”

갑자기 왜...”

아무래도 이건 정상이 아니야.”

??”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준식은 눈썹을 찌푸렸다.

 

목소리 낮춰.”

그게 무슨...! , . 말이 안 나온다. 그걸 지금 이유라고?”

그게 이유가 아니면 뭐가 이유가 돼. 목소리 낮추라니까.”

 

준식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덧붙였다.

 

난 승진할 거고, 해외에도 갈 거야. 어차피 흙수저 월급쟁이 신세인데 위로 올라라도 가 볼 거라고. 그러려면 부인하고 가정이 필요해.”

...”

 

석율은 기가 막힌 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물론 널 좋아는 하지만, 석율아, 이게 언제까지 가겠니. 막말로 결혼을 할 거야 백년해로를 할 거야? 이 정도 했으면 직성이 풀릴 때도 됐잖아.”

 

한 모금 더 삼킨 와인이 꼴깍 소리를 내며 준식의 목구멍을 넘어갔다. 석율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굳었고, 늘 따뜻한 빛을 품고 웃던 눈도 깊게 가라앉아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었다.

 

내 말 이해하겠어?”

 

주차 어디다 했어? 같은 내용에 어울리는 너무나 예사로운 말투였다. 석율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말없이 자기 짐을 챙기고, 카운터에서 제 회색 코트를 받아 걸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

 

미래에 뭐가 더 있다고 이래. 성준식은 끊어지지 않는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한석율은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견원지간일 때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의외로 잘 맞았다. 석율은 눈치가 빠르고 농담할 때 자신과 코드도 통했으며, 관계할 때에도 연하의 후배답게 배려가 있었다. 술김에 충동적으로 시작된 관계가 이만큼이나 지속된 것도 그 탓이었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준식은 사회의 한 부분에 안착하여 살 계획이었다. 기왕이면 중산층으로 안착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싶었다. 남들과 다른 것, 무언가 투쟁하여 이겨내야 할 것은 피곤하고 싫었다. 쉬운 길이 있다면 굳이 어려운 길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몸을 섞고 친밀하게 지낸 상대가 형편없이 상처 입은 걸 보는 것은 아무리 제 위주인 준식으로서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석율은 화를 냈고, 그 다음에는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렸고, 집착적으로 대화를 갈구했지만 성준식에겐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냥 그게 다였기 때문에 밀쳐내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밸런타인데이 저녁이었고, 새로 소개팅해서 만난 그녀와의 약속을 앞두고 있었지만 석율이 끈질기게 전화를 해 대는통에 카톡 확인조차 여의치 않았다. 짜증이 치솟은 준식은 욕설을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작 좀 해! 어쩌라고!”

“저기, 성준식씨 휴대폰 맞나요?”

가녀린 목소리가 당황한다.

, 주영씨. 죄송합니다. 보이스 피싱전화가 자꾸 와서.”

 

준식은 급히 얼버무리며 의자에 걸쳐 두었던 윗옷을 집어들고 선물도 챙겼다. 어디어디로 데리러 가겠노라는 약속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석율의 이름이 뜨고 전화가 온다. 그는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폰을 꺼 버렸다.

 

 

*

 

차를 빼던 준식은 기겁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1센티 간격으로 간신히 사람을 치지 않았다. 야 이 미친놈아 소리치려고 보니 석율이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차 앞에 선 모습은 좀 섬뜩했다. 말 꺼내기도 싫어져서 비키라고 경적을 울렸으나, 석율은 오히려 보닛에 두 손을 짚고 몸을 기대섰다. 준식은 창문을 내리고 머리를 내밀었다.

 

안 비켜? 너 진짜 왜 이래?”

어디 가십니까.”

알 바 아니잖아.”

그 분 만나러 가십니까, 그 소개팅? 기념일 그렇게 잘 챙기시는 줄 몰랐지 말입니다.”

알면서 왜 물어봐. 비켜, 형 늦었다.”

싫어요.”

아오!!”

 

준식은 운전대에 엎드렸다. 내가 어쩌다 저딴 거랑 시작을 해서 이 지랄을 하고. 그가 머리를 쥐어뜯는 그 짧은 순간에 다가온 석율은 열린 창 안으로 손을 넣어 운전석 문을 열었다. 준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석율의 표정은 너무 굳어서 인형같이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튼을 눌러 조수석 잠금장치를 연 후, 운전석 쪽 문은 열어 놓은 채 반대쪽으로 돌아와 옆자리에 탔다. 그 사이 준식이 문을 잠가 버리고 도망칠 것을 예상한 행동이었다. 성준식은 그만큼이나 뻔뻔하고 봐 주는 게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왜 타. 어쩌자고.”

 

화를 내려던 준식은 뒷차가 울려대는 경적 소리를 듣고 일단 차를 주차장 구석에 댔다. 약속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준식은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느라 혀를 차고 입술을 씹었으며 석율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석율아.”

가지 마.”

 

대놓고 반말지거리를 한다.

 

?”

 

석율은 몸을 돌려 준식을 똑바로 보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물기와 분노를 품고 일렁거렸다.

 

성준식, 당신 그렇게 가장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사람 책임질 줄도 모르고, 받는 데만 소질 있잖아? , 무슨, 누굴 만나서 어떻게 할 건데?”

 

준식은 기가 막혀서 웃음을 터뜨렸고, 정색하며 마주 노려보았다.

 

글쎄, 그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당신? 이제 막 나가기로 했어?

아닙니다, 선배님. 그런데요, 성준식 당신 받아 줄 사람은 나 정도라고. 그렇게 자신을 몰라?”

야!"

"그렇게 모르니까 이러겠지."

 

석율은 손을 뻗어 시동을 끄고 키를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울컥 화를 터뜨리려는 준식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챘고, 놀라서 몰아쉬는 숨소리를 제 입 안으로 삼켰다. 목 아래 단추가 하나 튕겨 어디론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굳어진 혀를 억지로 빨아 당겼던 석율은 입을 떼고, 제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동자는 비정상적으로 번들거렸다

 

초콜렛 받으러 가려고? 포기하시죠.”

“.......”

 

석율은 하얗게 질린 채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준식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뒤이어 그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원래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렛 나부랭이나 받는 날이 아니지 말입니다. 그럼 무슨 날이냐.”

“...그만해.”

새들이 첫 교미하는 날. 알겠어? 원초적인 날이라고.”

 

석율의 무릎이 다리 사이를 찍어 눌렀다. 단추가 없어져 벌어지는 칼라 사이로 미지근한 입김이 훅 끼쳤다. 


준식은 맨 살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에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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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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