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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은 3:7

짧은 망상 2015. 10. 20. 19:47

준식은 인트라넷에 올라온 워크샵 공지를 보고 인상을 썼다. 뭔 놈의 워크샵을 또 가. 봄에 가지 않았나? 돈이 썩어 나나? 그렇게 돈이 썩어나면 16층에 캡슐커피머신이나 놔 주지. 등등은 속으로 하는 생각이고, 겉으로는 반기는 척을 해야겠기에 입꼬리를 올려 본다.

“성대리, 한석율씨, 공지 봤지?”
“예, 과장님. 기대되지 말입니다.” 

준식은 자기보다 더 잽싸게 사회적 애교를 부리는 제 부사수를 흰 눈으로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어~ 과장님. 산행이라는데요, 단풍이 끝내주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단풍 보면서 술 한잔, 죽인다! 캬~ 응?”

가족이 모두 외국에 가서 혼자인 문과장은 환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준식과 석율은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작위적으로 웃었다.

*

“기대? 입에 발린 말 참 잘해, 우리 한석율씨.”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이런 거 엄청 좋아하지 말입니다. 다 같이 퐈이팅넘치게 건배! 산행! 단체생활 캬~”
“.....”
 
준식의 생각과 달리 석율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막내 포지션도 크게 싫어하지 않았다. 바쁘게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나로 인해서 조직에 피가 돈다’ 류의 자아도취를 느끼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어진 준식은 들고 있던 A4지 뭉치를 돌돌 말아 공연히 석율의 뺨을 톡 치고, 고개를 기울이며 예쁜 척 하는 걸 흐린 눈으로 보며 그를 탕비실에 남겨놓고 나왔다.



워크샵 장소는 단풍으로 유명한 강원도 모 산의 콘도였다. 계약직인 실무직들이 없어 수가 줄었지만, 평소 같으면 퇴근하여 침대에 누워 있거나 가족과 즐겁게 보낼 시간대에 거대 연회장에 줄줄이 앉아 건배하고 환히 웃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물론, 결혼 10년차 이상인 사람들은 제외하고.

누구를 위한 회식인가 싶던 자리도 술이 돌고 연회가 점점 흐트러지면서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윗대가리들은 별도 룸으로 빠지고, 나머지들도 팀별로 슬슬 모이거나 방으로 사라져 각자 잡담과 함께 음주분위기가 되었다. 술이 오르자 팀별 모임도 섞여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자 동기 모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목말라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단정한 자세를 유지 중이지만 꽤 취한 영이가 답답한 듯 단체 티셔츠 목을 당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백기가 즉각 반응했다.

“1층 가서 사 올까요?”
“문 닫았더라구요.”
“편의점 가죠.”
“아니에요. 꽤 멀던데.”
“편의점? 그럼 난 설#임! 아 탄산수도! 과자도!”

엉덩이 들 태세였던 백기는 냉큼 끼어들어 대답하는 석율을 보고 인상을 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왜 한석율씨 아이스크림을.”
“아, 알았어. 그러지 말고, 우리 게임해서 지는 사람이 가는 걸로 하자구, 친구들, 어때?”
“무슨 게임이요?”
“당연히 대작?”
“싫습니다.”
“자기가 불리하니까.”
“그냥 끝말잇기 해요. 저, 백기씨, 석율씨 순서.”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보며 영이는 진지하게 운을 띄웠다.

“그럼 할게요. 칼륨.”
“장백기 딱! 걸렸네, 없네~.”
“륨본드.”
“뭐야. 백기씨, 전문용어 쓰기 있어?”
“드!”
“거 참 왜 소리를 지르고... 드라마.”
“마그네슘.”
“영이씨, 저 미워해요? 슘페터.”
“헉 미친! 그걸 또! 슘페터... 터...”

석율이 막히는 순간 둘은 눈을 반짝거렸다.

“10, 9, 8...”
“아니 영이씨, 이러기야? 카운트다운 갑자기 왜 생겼는데?”
“7, 6...”
“아 잠깐 잠깐마안~”

분명히 단어가 있을 텐데 술기운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을 구르며 반항하던 석율은 결국 패자가 되어 나설 수밖에 없었다.

*

편의점은 콘도에서 나와 주차장 아래 내리막길을 한참 지나 숲길로 걸어가야 있었다. 석율은 추리닝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산이라 제법 쌀쌀한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 숙여 불을 붙인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숲길 옆 바위 위에 동그마니 앉은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복슬복슬하게 부풀고, 혼자 튀게 단체 티셔츠가 아닌 새파란 티를 입고 앉아 먼 곳에 눈을 두고 있다.

“성대리님.”

준식은 석율의 목소리에 두 손을 들며 반겼다.

“썽뉼아~ 우리 썽뉼이, 왜 나왔어.”

취했구만. 괜히 아는 척 했다는 후회에 석율이 발걸음을 슬슬 물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준식은 반색하며 바위 위에서 달랑 뛰어내려 다가왔다.
 
“대리님은 왜 나와 계십니까?”
“나? 나야 뭐...”

준식은 말 끝을 흐리며 석율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은 담배를 재빨리 가져다 한 모금 피웠다.

“어디 가?”
“아이스크림 사러... 같이 가실래요?”
“갔다 와라.”

그가 손을 내젓는 걸 보고 석율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 하려고 했으나.

“아, 잠깐만.”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역시나, 하고 멈춰 섰다.

“왜요.”
“가는 김에 내 꺼도 사와.”
“뭐 사다 드려요?”
“뭐든 너 사고 싶은 걸로, 10개.”
“열 개요? ...대리님도 벌칙으로 나오셨죠?”
“들켰네~"

준식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거렸다.

“찾아보고 있으면 그런 걸로 사와. 그런 거.”
“뭐 말씀이십니까. 비#빅? #밤바? 아님 붕어빵모양 그거?”
“우리 한석율씨 역시 눈치가 빨라.”

심부름을 맡아 심사가 뒤틀린 두 사람은 악의적으로 낄낄 웃었다.

“프흐, 가시죠.”
“아니, 너 갔다 오라고.”

물론 석율은 끝까지 웃지 못했지만.

*

석율은 오르막길을 느적거리며 올라왔다. 양 손에 봉투를 든 데다 숨이 차서 슬슬 화나는 마당에, 팔다리 편하게 늘어뜨리고 앉아 자기한테 뺏은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준식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

“사왔습니다.”
“어~ 썽뉼. 수고했어.”

봉투를 받아 들려던 준식은 석율의 가슴에 뚫어지게 시선을 두었다.

“또 왜요.”

석율은 짜증난 티를 내려다가, 긴 손가락이 티셔츠 아랫자락을 잡고 훌렁 들치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뭐 하시는!"
"섰네?"
"섰...? 아니 이거 놓으시라구요! 익!"

실제로 서울보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유두가 서서 티셔츠 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 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있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석율은 몸을 흔들어 준식의 손을 떨쳤다.

"성희롱 아닙니까?"

준식은 다 피운 꽁초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너랑 나 사이에 성희롱은 무슨."
"사귀는 사이에도 성립하지 말입니다."
"여고생처럼 왜 그래? 닳냐?"
"워우, 소름돋아. 그럴 때 진짜 아저씨 같은 거 아세요?"
"내 꺼 줘. 이거, 딸기맛."
"...."

평소처럼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석율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 포기하고, 비인기 아이스크림들 사이에 숨어 있는-원래는 자신이 먹으려고 산-요거트맛 바를 꺼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짙은 핑크색 얇은 혀 끝으로 연한 핑크색 바를 핥아 올리고, 불투명한 흰 액체가 혀 위로 녹아 내리는 것을 보고 괜히 귀가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으나, 곧 들고 옆눈으로 훔쳐 보았다. 야외에서 옷도 들침당한 마당에 망상이 그렇게 큰 죄랴 싶었다. 숲 옆 길을 차박차박 발걸음 소리만 내며 말없이 걸어올라가던 석율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준식에게 맞춰 섰다.

"에이. "

준식은 아이스크림을 다른 손에 옮겨 쥐고 탈탈 털었다. 손등에 연한 핑크색으로 방울져 녹은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있었다. 석율은 허리를 굽혀 봉투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준식의 손을 잡았다. 준식은 제 손등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핥는 숙인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일 듯 말듯 잘 생긴 눈썹이 찌푸려져 미간에 선이 가고, 예민한 피부를 지나는 혀 끝은 간질거리고, 치뜨는 눈은 건방졌다.

"...대리님."

준식은 그가 제 입가를 핥고 달콤한 맛이 남은 혀와 입 안을 맛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려뜨린 손에 들린 하드가 녹아 아스팔트에 희미한 얼룩을 만들었다.

*

"그래서, 마부장 거기서 백만원 털렸잖아."
"미친 새끼! 후환은 어쩌고?"
"존나 기억못해. 하나도 기억못한다고오~"

석율은 허세스럽게 떠드는 준식을 흐린 눈으로 보며 봉투에서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꺼내 모두에게 내밀었다. 말랑한 기분이 되어, 아이스크림만 건네고 준식과 같이 사라지려고 했는데 갔다 와 보니 어찌 된 노릇인지 대리들과 자신의 동기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입 안 뿐 아니라 몸을 팔 안에 바짝 안고 누구보다 가깝게 맞대고 싶은 욕망은 자신만의 것이었는지, 성준식은 제 동기들과의 잡담에 금방 빠져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술을 한 잔 따르러 왔던 석율은 준식에게 어깨를 잡혀 옆에 억지로 앉았다.

"야, 얘가 왜 째려보고 있냐?"

취한 준식은 울화 때문에 여즉 곤두서 있는 석율의 한 쪽 유두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성.. 성대리님."

버럭 화내려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겨우 웃으며 가슴을 가리는 석율을 보고 대리들은 낄낄 웃기 바빴다. 이미 만취해서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데다, 같은 남성이라서 경계심도 희미했다.

"나도 해 볼래, 띵동~"
"이리 와 봐, 우리 한석율씌!"

석율은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슬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본인이 오지랖이 넓은 만큼 많은 것에 관대한 그였지만 이건 좀 곤란했다. 그 때, 준식이 석율 앞을 막아섰다.

"야!!! 이것들이...! 어디서 함부로 건드려~ 남의 사수를."

취한 목소리지만 꽤 정색하고 있었다. 석율은 근본적인 원인제공자가 성준식이라는 것도 잊고 감동했다.

'웬 일로 대리님이 날...'
"만지려면 돈 내고 만져!"
"감사.... 예??!!!"

준식은 경악으로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뻐끔대는 석율을 뒤에서 안았다.

"한 번 누르는 데 만원."
"폭리 아냐?"
"만원 내지 뭐. 평소에 인사 잘 하고 일도 잘하니까."
"아니! 아니 잠깐 이건! 제 인권은요? 악!!"

석율이 발버둥치고 대리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만원씩 내는 동안, 백기는 흐린 눈으로 구석에서 탄산수를 마셨다. 영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못 도와줘서 미안합니다, 한석율씨.'

석율이 강제 띵동을 당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 사과하던 그는 강해준 대리가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제 옆에 앉는 바람에 얼른 병을 집어 들었다. 존경하는 제 직속 사수가 저런 남학교스러운 장난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강대리님, 저, 한 잔 드리겠습니다."

해준은 백기의 말에도 묵묵히 잔을 받으며 붉어진 눈매로 그를 멀거니 보다가, 갑작스레 그의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백기가 얼어붙어 있는 동안 한 번에 잔을 다 비우고 그걸 되돌렸다.

"백기씨도 한 잔 받으세요."

돌이 된 듯 굳은 백기의 뒤로 한석율이 아햐학 간지럽..! 그만하시라구여! 하고 발버둥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메아리쳐 들려 왔다.

*

"뭘 그렇게 삐지고 그러냐. 장난이잖아."
"상대방도 재미있어야 장난 아닙니까?"
"아홉, 열, 열하나. 십일만원 벌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늘 그렇듯 귓등으로 안 듣는 태도에, 석율은 길게 한숨을 쉬고 준식을 노려보았다.

"...반띵해요. 제 몸인데 저도 권리 있지 말입니다?"
"넌 재료만 제공했지, 포장해서 상품으로 만든 건 나잖아? 7:3."

아아앍.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들끓는 분노를 꾹꾹 누른 석율은 '3'을 강조하느라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내밀고 있던 손목을 낚아채 품에 당겨 안고, 가는 몸을 덮쳐 눌렀다.

"썽뉼아, 형 피곤하니까 비켜라."
"아까 하던 거 계속 하시죠."
"싫어."

손바닥으로 뺨을 밀치던 준식은 순순히 안 밀려나는 석율에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어? 이것 봐라. 야 한석율, 싫다고."
"이것도 장난으로 쳐주세요. 장난인데 왜 그러십니까."
"꼭 따져야겠냐?"
"꼭 따져야겠는데요."

석율은 머리카락이 뭉텅 잡히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발버둥치는 몸을 누르고 파란 티셔츠를 걷어 건조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핥았다. 준식의 유두는 바짝 서 있었다.

"섰네요."
"넌 이 새끼야, 꼭 그렇게 고대로, 아, 돌려줘야 직성이..!"

유두를 혀 끝으로 자극당하는 찌릿한 느낌 때문에 붕 뜬 채 불평하던 목소리는 조심성 없이 와 닿고 혀를 물어 당기는 입술에 의해 중간에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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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대리님이 처음에 말리다가 '만지려면 돈내고 만져'라고 말하는 상황은 낮달님 ‏@rlgudeh0216 썰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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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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