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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성분 - 01

짧은 망상 2015. 11. 25. 13:37


석율은 낡은 가죽 소파 팔걸이를 의미 없이 쓰다듬었다. 몇 번을 와도 적응되지 않는 장소였다. 오래된 먼지 냄새가 감돌았고 평소에 자주 쓰이지 않는 공간다운 냉기가 실내에 감돌고 있었다. 종로구의 40년된 낡은 4층짜리 빌딩 꼭대기의 간호학원 간판 안쪽은 사실 학원이 아니었다. 국정원 산하의 비밀 기관인 이형능력자관리국, 줄여서 이능국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안정을 위협할 만한 사람들을 국정원에서는 따로 분류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그 수는 횡으로도 많지 않았고, 종으로 쳐도 긴 시간에 걸쳐 드문드문 출현한 탓에 존재감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관리는 필요했다. 능력의 종류는 제각각일지라도 그 소유자들에게는 공통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버려두면 반드시 사건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낌새가 보이며, 사춘기 때 폭발적으로 강해진다. 그리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광증을 보인다. 초인적인 능력이 강한 스트레스를 동반해서이거나, 적어도 뇌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했다. 청년기를 지나 30 전후가 되면 광증은 절정에 달한다. 그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대량 살인을 하거나, 대중 앞에서 화려하게 자살을 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생시키는 등 현실에 기반을 둔 대중의 인식 세계에 혼란을 일으켰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능국에서는 이런 능력자들을 섬에 격리된 정신병원에 가두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튀는 능력들 사이에서 튀지 않는 능력자가 발견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능력자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능력자. 소위 유도자’. 첫 유도자는 스스로도 제 능력을 몰랐지만 능력자들 제어에 뛰어난 성과를 발휘한 이능국 직원이었다. 통제 불능일 줄 알았던 능력자들이 제어될 수 있음이 알려지자 국에서는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더 찾아내려고 애썼다. 사회 안전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역으로 이용할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비과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과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면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모으고 가설을 세워 증명하고 난 후 정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근 몇십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능력자유도자사이에 밝혀진 몇 가지의 법칙은 제도화되었으며, 시스템은 안정되었다.

 

석율은 국장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유도자 출신인 그는 대단히 피곤해 보였고,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앉아 봐.”

 

가타부타 인사도 없이 앉으라고 손짓한 후 석율 쪽은 보지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것 좀 봐봐.”

 

석율은 그가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꽤 두툼했고, 정신과 소견서부터 사건경위서까지 여러 가지가 첨부되어 있는 걸 보니 사고뭉치 같았다. 잡다한 첨부서류를 넘기고 나자, 아래에 원래 신상이 드러났다.

 

성준식. 32세 남자.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 능력.... 정신측정? 이거, 싸이코메트리에요?”

. 한 대 피울래?”

 

석율은 고개를 젓고 서류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자신 이전의 유도자들이 남긴 의견서를 넘겨 본다.

- 제어가 너무 힘듦.

- 접촉을 극도로 거부하고 소통이 되지 않음.

- 양심이나 도덕에 대한 인식이 낮고 자기 위주.

- 능력을 역으로 이용해서 과거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 유도자에게 쇼크를 줌.

 

“...저보고 하란 말씀이십니까?”

네가 잘 맞춰 주잖아.”

그럼 전 뭐 해주실 건데요.”

월급 주잖니.”

정규직 채용해주세요. 4대보험도 안되면서.”

, 정식 예산편성에 우리 국은 못 들어가는 거 알잖아~ 공무원 채용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럼 활동비라도 올려줘요.”

석율아.”

안 그러면 안 해.”

, 새끼...”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리는 석율을 보고, 국장은 인상을 쓰며 담배를 빨아댔지만 딱히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성준식과 관련된 파일이 담긴 USB를 석율에게 내밀었다.

 

*

 

준식은 이불에 감싸인 채 누워 있었다. 주말이었지만 어디에도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접촉을 굉장히 싫어했다. 각종 사물들이 담고 있는 담담한 이야기는 견딜 만 했지만,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갖 악의, 욕정, ‘,,를 담고 있는 외침들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신과 갈등을 빚은 유도자가 떠나고 나자 단상들은 사방에서 낮게 진동하며 머릿속에 와서 꽂히는 것 같았다. 수면제를 먹으려고 몸을 일으켰던 그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택배든 포교든 하여간 모른 척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초인종은 끈질기게 울렸고, 그가 무시하자 장난스럽게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고만해!!!”

 

더럭 화가 난 준식은 조심성 없이 문을 열었다.

 

계셨네요? 성준식씨.”

 

눈 앞에 나타난 인간은 뻔뻔하게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가운데 가리마를 타서 이마를 드러내고, 동그란 눈은 보통 사람의 눈보다 훨씬 더 번뜩거리고 물기가 어려 기묘해 보였으며, 남자같지 않게 새하얗고 티 없는 피부와 색이 진한 입술은 소년 같은 이미지였다.

 

누구.”

한석율입니다. 메시지 못 보셨어요? 우리 성준식씨 새 담당.”

 

석율은 들어오란 말 없이도 명랑하게 윙크하며 제멋대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가슴께에 와 닿는 뭔가를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뭡니까.”

나가.”

 

구두주걱이었다. 힘을 주어서 밀어 쿡 찌른다.

 

너무하시네, 문전박대. 새 담당이라니까요?”

나가라고오.”

 

석율은 앞으로 몸을 밀었지만 상대는 밀리지 않았다. 눈썹을 살짝 찌푸려 인상을 쓴 얼굴은 버석했고, 손에 든 게 진짜 칼이라도 되는 양 으르며 입을 앙다물고 어두운 눈을 치뜬다. 석율은 씩 웃었다. 예민해 보이긴 했지만 예상과 달리 귀염성이 있었다.

 

맘에 들어요.”

어쩌라고. 꺼져.”

안 꺼질 건데요.”

 

석율은 손을 들어 성준식의 뺨에 대는 시늉을 했다. 질겁하고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걸 보며 신발을 벗고 올라선다.

 

!”

못 들어오게 하면 손 댈 건데. 싫죠? 에비~.”

아 뭐 이런 또라이새끼가!”

 

짜증으로 목소리가 뒤집힌다. 석율은 목도리를 풀고 역시나 제 멋대로 식탁에 앉았다. 티셔츠에 발뒤꿈치까지 오는 추리닝 차림인 준식은 못마땅한 듯 앉지 않고 옆에서 서성거렸다.

 

손님인데 차라도 한 잔 주시죠.”

누가 손님이야.”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한석율입니다. 유도자 경력은 3년이구요.”

경력자야? 전 담당자는.”

이전에 담당했던 능력자는 사망.”

 

준식은 고개를 들었다. 가벼운 말투였다.

 

사망?”

제 탓은 아니고.”

 

석율은 일어나 제 집인 것처럼 컵을 두 개 꺼내고, 포트 스위치를 올린 후 티백을 담가 차를 우렸다.

 

남친이 있었는데, 저랑 사이를 의심해서 떠났거든요. 그렇~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믿지를 않아.”

“...그래서.”

뛰어내렸어. 거참. 남자가 뭐라고.”

네 탓 같은데?”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석율은 준식 쪽에 컵을 놔 주고 다시 자리에 앉으며 덧붙였다.

 

여친 말 못 믿고 떠난 새끼랑 그거 못 견디고 뛰어내린 애 탓이지.“

 

녹차를 홀짝 마신 석율은 제 미간 사이에 검지를 갖다 대고 허우, 인상,’ 하고 속삭였다. 준식은 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찡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고 명랑한 말투가 거슬렸다.. 자신 역시 유도자들에게서 몇 번 소시오패스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사적인 관계는 아닐지언정 같이 시간을 오래 보내고 접촉하던 파트너가 사망했다는 건 꽤 무거운 주제가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성준식씨는 전 담당자 관뒀을 때 슬펐어요? 그건 확실하게 그 쪽 탓인데.”

아니.”

 

석율은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크흑 웃음을 터트렸다. 준식은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 손을 대자 방금 석율이 나불나불 해 댔던 말들의 잔상, 머그를 딱. 내려놓는 순간의 진동, 허우, 인상. 하고 짓는 표정들의 메아리들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웅웅거리며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래서 말인데 동조화 일정은..... 머리 아파요? 두통? 생리통?”

, , 닥쳐.”

 

준식의 목소리는 짜내는 듯이 눌려 있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고 숨을 몰아쉰다. 몸에 엄청나게 힘을 주는 듯 의자가 뒤로 덜컹 밀렸다.

 

이래도 유도자 필요없어요? 힘들어보이는데.”

지겨워. 좀 내버려둬. 니들이 뭔데 남의 생활에 사사건건 간섭을... ? 막말로.”

 

두통을 억누르려고 감은 눈꺼풀 뒤로 안구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좀 위험한데.’

 

석율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상대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동조화는 하지 않았지만 유사시에는 접촉할 생각이었다.

 

막말로 내 생활을 책임져, 월급을 줘? 관리 좋아하네, 개애새끼들!”

성준식씨.”

 

뻗은 손 끝은 준식의 팔꿈치에 닿았다. 끝이 날카롭지 않은 꼬챙이로 찌른 듯한 둔탁한 통증과 함께 눈 앞이 흰 빛으로 명멸하는 듯한 착각, 머릿속을 회오리치며 휩쓰는 감각이 그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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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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