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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님 썰-01

짧은 망상 2016. 7. 24. 19:37
술 한 잔 할래. 라는 말은 권유가 아니다. 업무 시간이 끝났다고 업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성준식도 그런 류의 잔업 중이었다. 그는 선배 및 동기들과 라이브 바에 앉아, 하품을 억지로 누르며 땅콩을 까서 입에 넣었다. 앞으로 탈 라인 그 자체인 선배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잘 해야 했다. 그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척 몸을 앞으로 기댔다.

“그런데 웬 라이브? 박 과장 이런 취향이야?”
“여기 화요일 목요일에만 오는 가수가 있는데, 걔 팬이거든.”
“얼~ 박 과장 올해 장가가나?”
“아니야. 그게, 여자가 아니고 여장한 남잔데, 노래를 되게 잘하는 건 아닌데……. 뭐, 묘하게 매력이 있어.”

준식은 남 몰래 인상을 쓰며 어금니로 땅콩을 물어 부쉈다.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에 다른 일행들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우~ 선배 게입니까? 형수님 아니고 형님 생기나요?”
“아냐 임마!”

와르르 웃어대는 소리는 갑자기 사그라졌다. 무대 뒤편에서 기타를 들고 나타난 사람 때문이었다. 얼핏 상당히 예뻐 보이지만, 짧은 원피스 아래로 첫눈에도 여성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몸 선이 드러난다. 준식의 일행이 일제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마주 본다. 강아지처럼 검은자가 큰 맑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준식은 흠칫 놀랐다. 깜빡,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한 눈은 곧 다른 곳을 향했다. 노랫소리는 굳이 꾸미지 않은 남자 그 자체였다. 뛰어난 보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준식은 선배가 왜 팬이라고 자처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힘 있는 목소리임에도 끝부분은 나약한 느낌을 주며 데크레센도되고, 들숨이 노래로 전부 치환된 후 잠시의 순간 얼굴에 깃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눈을 사로잡았다. 뻔한 가공 초콜릿을 씹었는데 안쪽에서 갑자기 씁쓸한 위스키가 튀어나온 것처럼, 그리고 그 맛은 한참을 손대지 않아 굳어 있던 머릿속 어딘가를 헤집었다. 아득하게 어둠 속에 가라앉아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술렁거렸다. 불안한 듯도, 설레는 듯도 한 어떤 감정과 기시감. 연달아 두 곡 노래가 끝나자 그 실체 없는 감정도 따라 자취를 감췄다. 그의 일행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준식은 손바닥을 몇 번 소리나게 마주치며, 어둠 속에 묻힌 기억의 끄트머리를 소득 없이 더듬었다.

 *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둔 7월은 응당 즐거워야 하지만 기말고사가 먼저였다. 야간자율학습이 막 시작될 시간, 준식은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아무도 없는 별관으로 향했다. 창문으로 붉은 석양빛이 들어와 복도 바닥에 주황색 네모 패턴을 만들었다. 하나 둘 셋, 검은 부분 밟으면 죽음. 준식은 늘어선 빛덩어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본관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운동장에선 구령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기타 소리도. 환청처럼 아득하던 그 소리는 발걸음을 옮길수록 더 크게 들렸다. 조금 열린 기타 동아리실 문 사이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G-B-C-Cm, 반복되는 코드와 함께 나지막한 허밍이 들린다. 준식은 저도 모르게 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둑어둑한 안쪽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저무는 빛이 그의 왼쪽 뺨에 내려앉아 얼굴 반쪽을 붉게 물들인다. 나머지 얼굴 반은 푸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미술 시간에 배웠던 입체파 그림 같은 그 얼굴은 준식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후배, 한석율.그는 남자학교인 이 곳에서 선배에게 고백했다는 흔치 않은 이유로 유명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낮은 허밍은 나약하게 들렸다. 손가락 끝이 코드를 꾹꾹 누른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갔던 준식은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낡은 문 때문에 흠칫 놀랐다. 기타를 치던 손 역시 놀란 듯 멈칫한다. 다른 빛으로 반씩 나누어졌던 얼굴이 들린다.

*

첫 방문 이틀 후, 준식은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그 곳을 다시 찾았다. 벌쭘하게 2인석에 혼자 앉아 다리를 떨던 그는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고 밴드가 준비에 들어가자 몸을 바로 했다. 준식은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한 순간 눈이 마주치자 센 척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술렁거린다.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분명 저런 족속에 거부감이 있을 텐데도 드물게 예뻐서일까 아님 다른 이유에서일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회사 생활 몇 년이 지나면 사람은 굳는다. 보드랍던 빵 껍질이 공기 중에서 굳어지듯이. 방어적으로 움츠린 어깨는 그대로 고정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억누르던 감정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변한다. 그녀, 또는 그의 존재에는 그렇게 두꺼워진 표피를 뚫고 들어오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준식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테이블 아래에서 박수를 치고, 미지근해진 술을 넘겼다. 오는 날이 언제언제랬지. 화요일, 목요일. 입 안으로 중얼거린다.

*

- 근데 한석율이 좋아한다고 했대! 아 소름.
- 느갬. 구라 까지 마.
- 아 진짜라고 시발아. 서로 대딸만 쳤는데 삘받아서 고백했대 막.
- 대딸받다 후장 털릴 뻔.

그 주제는 석식 먹는 짧은 시간에 가볍게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정도의 것이었다. 소문의 당사자가 죽을만큼 괴로울지는 몰라도 만사가 심심한 그들에겐 그저 그런 반찬거리. 준식은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이며 멀건 카레에서 당근을 골라냈다. 우울해 보이던 눈동자,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얼른 사과하던 움츠러든 표정을 떠올린다. 낮은 허밍 소리도.석식 후 짧은 휴식 시간은 농구를 하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쉬운 유희거리를 찾아 오늘 화제에 오른 문제의 ‘한석율’을 구경하러 갔다. 무리에서 튀고 싶지 않았던 준식도 적당히 휩쓸려 따라 갔다. 그들은 교칙을 어기고 1학년 층으로 가 뒷문으로 안쪽을 기웃거렸다. 한석율은 교실 맨 뒤 창가에 홀로 앉아 있었다.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쓴 흰 얼굴은 준식이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얼굴은 좀 봐줄 만 한데.”
"저게? 시력 빠개졌냐."
"니보단 나음. 평타 이상인데?"

한석율은 찾아와서 구경하고 야지 놓는 인간들에게는 이제 익숙한 듯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책을 들여다본다.

“야, 한석율? 외모 평타 이상 치면 박게 해주냐?”
“야 시발ㅋㅋㅋㅋ이새끼도 께이새끼 아냐. ”
“엠창 아니거든? 냄새 안 나게 생겨갖고 이쁘잖아.”
"야, 쌩까네?"

준식의 무리 중 하나가 집어던진 팩우유 빈 곽이 석율의 머리에 정확히 가서 맞았다. 탁, 속이 빈 소리가 나고 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한석율은 모른 척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며 안경을 벗자 안광이 번득이는 눈망울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준식은 몇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못 박아요, 선배님. 외모가 하타치셔서."
"뭐, 뭐라고?"
"존나 좆같이 생겨서 못 박는다고. 좆같은 병신새끼야."
"이새끼가 돌았나!"

덩치가 큰 준식의 급우는 석율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너 나보고 박고 싶다고 했냐? 드러운 게이새끼는 너네."
"이 씹!"

석율을 내동댕이친 그는 가슴께를 발뒤꿈치로 찍기 시작했다. 석율이 몸을 웅크려 방어하는 사이, 나름대로 생기부 관리와 수시에 뜻이 있는 나머지 무리는 준식처럼 슬슬 물러나기 시작했다.

"야, 야 하지마... 생활부 끌려 감."
"이 시발년아!"

준식은 팔짱을 끼고 좀 떨어져 벽에 기댄 채 미간을 찌푸렸다. 욕설과 무작스럽게 퍽퍽 밟는 소리가 거슬렸다. 석식을 먹고 돌아온 1학년들이 주변을 기웃거리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고만 하라고. 종 친다 가자."

그들은 씩씩거리는 놈을 뒤에서 잡아 끌었다. 못 이긴 척 물러나 계단으로 내려가는 동안, 준식은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석율을 보았다. 석율은 격하게 기침을 하며 일어나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피가 떨어진 셔츠 칼라를 보며 혀를 차고 눈을 든다. 준식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랐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증오, 자기 모멸, 준식으로서는 모를 어두운 감정들. 한참 그를 보던 석율은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준식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수치스러웠다. 그는 실내화 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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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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