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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면

전력 60분 2016. 7. 17. 14:24
키스하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같이 웃고,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만들고.  모든 게 상대의 옷을 벗기기 위한 수법은 맞지만, 한석율은 그 과정 자체도 즐기는 반면 성준식은 목표가 지연되는 걸 귀찮게 여겼다. 둘은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대리님 저희 집에 처음 와 보시죠. 야경이 예쁘지 말입니다.”
“이야, 넓네. 이 정도 살려면 월세가 얼마야?”

대화에서부터 서로 너무나 다른 걸 추구하고 있는데도, 석율은 한 가지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악을 틀고 조도를 낮춘 후 냉장고를 열며 와인이 어쩌고 종알거리던 석율은 상대가 이미 욕실에 들어가 버린 걸 깨닫고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머리카락에서 물을 떨구며 나왔을 때는 더욱 더. 준식이 맨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준식의 등 가운데 오목한 곳을 따라 다 닦이지 않은 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물방울은 궤적을 그리며 작은 엉덩이 골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늘 건조해보이던 피부 역시 덜 말라 촉촉했고, 있는 힘껏 틀어 놓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살갗과 유두가 곤두섰다. 멍하니 바라보던 석율은 식탁에 와인을 주르륵 쏟았다.

“대… 대대, 대….”
“대대 뭐어.”
“어오, 대리님∼ 뭘 좀 걸치시고.”

석율은 당황할 때 나오는 버릇대로 허둥거렸다. 준식은 머리에서 수건을 벗겨 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사우나도 같이 가놓고.”
“그게, 그거랑은 다르죠. 아, 일단 뭐 좀 드시…?”
“안 먹어. 침대 어디야?”

성준식은 욕망 앞에선 거침이 없어서 석율이 바라던 분위기라곤 한 톨도 없었지만, 이미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너무 다르지만, 그래도 종착지는 한 군데이므로. 석율은 와인 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 새 에어컨을 더 낮춰 놓았는지 추울 정도였다. 석율은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복층으로 올라갔다. 준식은 이불 안에 완전히 몸을 폭 묻은 채 얼굴만 동그마니 내 놓고 있었다.

“추우면 온도를 높이시지.”
“딱 좋아.”
“그러시겠죠.”

자기 집 아니라고 막. 석율은 입 안으로 투덜거리고, 일부러 이불을 훌렁 들췄다.

“아익, 추워.”
“추운 게 좋으시다면서요.”
“따지지 좀 마라.”
“그게 제 매력인데.”

준식은 눈 밑을 접어 올리며 면박을 주려고 했으나, 석율이 침대 위로 올라와 허벅지에 손을 대자 입을 다물었다. 취기를 빌어 급하게 이뤄졌던 첫 관계와 달리 석율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손바닥이 가볍게 매끄러운 배를 쓸고, 위로  올라와 차가운 공기에 일어난 젖꼭지를 매만진다. 얕게 호흡하며 상대가 어떻게 나오나 보던 준식은 배꼽 위부터 가운데 옴폭 파인 곳을 따라 올라오는 혀끝에 숨을 들이키고 목으로 침을 넘겼다.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던 손은 무릎을 더듬었다. 꼭지 주변 예민한 곳을 핥다 입 안으로 살며시 빨아들이고 내어 놓은 후, 길게 늘어지는 준식의 숨소리를 들으며 젖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많은 것이 담긴 두 시선이 마주쳤다.
성준식은 따지자면 감정에 있어서 그다지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본심을 숨기기 힘든 순간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석율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가락을 차갑게 식은 머리카락 안으로 넣었다. 두피는 뜨거웠고, 석율의 고개는 내려갔다.

“음.”

작게 소리 내는 얼굴을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올려다 본 석율은 입 안에서 단단해지는 유두를 혀끝으로 굴리며 손으로 천천히 준식의 성기를 애무했다. 그리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표정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기민하게 살피는 평소 성준식의 표정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그것을. 늘 어느 정도 띠우고 있는 거만한 기색과는 별도로, 뭔가를 바라듯 석율을 직시하며 열망을 드러낸다. 낯익고 낯선 상대. 오랫동안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그러나 깊은 곳에서부터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상대. 석율은 주저하며 시원한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얼굴을 들어 키스했다. 상대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둘의 고착된 사회적 관계는 어느 정도의 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준식은 일방적으로 봉사를 받으면서도 위화감 없이 받아들였다. 석율이 그의 성기 끝을 빨고, 혀를 세워 옴폭한 곳을 간질이다가 입 안에 넣고 핥아 올리는 동안 그는 수그려진 머리를 쓰다듬고,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쾌감을 적당히 누르느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아, 좋아. 아니 그렇게 말고. 그렇지. 음, 으.”

머리를 내리 누르고 허리를 느적하게 움직이며, 한참 어린 여자애를 구슬리듯 하는 말투에 석율은 발끈했다. 침대 위에서도 선배인 건 아니지 말입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강하게 빨고 고갯짓을 빠르게 했다. 준식의 숨소리가 헐떡거리며 높아지기 시작하자 입 안에서 빼낸다. 석율은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 주름져 단단하게 다문 곳을 적셔 연다.

“……!”

여유롭게 베개에 기대 있던 머리가 들렸다. 준식은 당황하며 다리를 움츠렸지만, 단단한 손이 그의 허벅지를 벌려 눌렀다. 간질거리며 적셔 오다 몸 안쪽을 찬찬히 엿보고 두드리는 감각은 여태까지 익숙했던 감각과는 전혀 달랐다. 준식은 저도 모르게 크게 신음했다.

“흑, 아…, 앗!”
“…싫어요?”
“아니.”

너무나 즉답이었다. 석율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야 성준식이지 싶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올라와요. 만져줄게.”

준식은 건방진 말투에 혀를 차면서도 석율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두터운 팔이 마른 허리를 당겨 안고, 다른 손이 충혈된 성기를 느리게 문지른다. 목에는 더운 숨이 끼쳤다. 준식은 석율의 등을 마주 안고, 어깨에 이마를 댔다. 차갑게 식은 피부는 맞닿으며 뜨거워져 녹아 붙을 것 같았다.

석율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스스로도 느꼈다. 성준식이 순순히 제 무릎 위에 올라와 앉는다. 아직도 물기가 맺혀 있는 머리카락이 어깨 위를 간질이고, 긴 손가락 끝은 등줄기를 쓸어내린다. 흐으 하고 끝이 늘어지는 숨소리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된 가쁜 호흡을 입으로 토해냈다.

아까까지 조심스럽던 손길이 갑자기 격해지자 준식은 눈을 크게 떴다. 끝까지 몰아갈 것 같더니 돌연 손을 떼고, 엄지손가락 끝으로 선단을 만지다 치골과 허리로 옮겨 간다. 준식이 참지 못하고 스스로 제 것을 수음하는 사이 석율의 두 손은 뒤로 와 작은 엉덩이를 잡아 쥐었고, 그 사이로 발기한 성기가 문질러졌다. 민감한 곳에 마찰되는 동안 그것은 점점 형태가 뚜렷해져 꺼떡였다. 준식의 유두는 잇새에 물렸다. 준식은 오싹한 감각에 허리를 비틀었다. 석율의 거친 숨결은 말로 꺼내지 않는 욕망을 표하고 있었다.
 
+

침대에 엎드린 준식의 허리를 두 손이 내리눌렀다. 준식은 내장이 솟구치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몸 안이 꽉 차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는 통통증과 쾌감, 소름끼침이 엉망으로 섞인 감각을 이기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 끝나고, 석율이 완전히 들어오고 나자 숨을 들이쉴 때 마다 통증이, 내쉴 때 마다 구역질이 났다. 그는 혀 밑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헐떡였다.

석율은 손 아래 단단한 살덩이를 쥐어 잡았다. 위로 쏟아지는 찬바람 때문에 그의 등에는 소름이 돋았지만, 꼭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감각이 한 곳에 집약되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여 표면을 쓸며 명멸하듯 번뜩이는 쾌감에 압도당한다. 숨기지 못해 할딱이는 숨소리를 듣고, 작은 입 안에 손가락을 넣는다. 처음의 조심성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감각을 찾아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좁은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어 상대를 신음하게 했다.

뻐근한 통증은 무딘 쾌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준식은 스스로 제 것을 만지려고 손을 내렸고, 곧 저지당했다. 그의 손가락이 마디가 굵은 석율의 손가락과 얽혀 다시는 풀리지 않을 것처럼 내리 눌렸다. 뒤에서 밀쳐지느라 흔들린 머리는 아플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만 해. 아니 그만 하지 마. 그는 석율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석율은 몸을 빼고, 준식의 몸을 뒤집어 완전히 흐트러진 얼굴에 입술을 댔다.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퍼득거리는 허벅지를 눌러 쥔다. 위로 들리며 휘어지는 가슴에 키스하고, 제 배에 문질러지는 성기를 같이 잡아 흔들었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꿀 때처럼 가슴 아래쪽이 치받고 고양되는 기분을 느꼈다. 추락이지만 비행과 비슷하다. 땅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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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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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어두운 무대 위, 단 하나의 조명이 의자에 앉은 석율을 비춘다. 얼굴에 강한 음영이 진다. 고개를 서서히 들고 관객을 보는 석율, 무표정한 얼굴에 갑작스레 과한 미소를 지어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석율: 들었지, 자기들. 난 지금 심각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이름? 글쎄,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정신적인! 알레르기 질환이랄까. , 그 말이 딱 맞아, 정신적인-알레르기.

 

무대 왼쪽에 조명이 들어온다. 성준식이 편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본다.

 

준식: (설명을 책 읽는 말투로 낭독) ~ 알레르기란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만 두드러기, 가려움, 콧물, 기침 등의 이상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며) 이거지. 보통 사람들은 넘어가는 것들을 우리 부사수만은! 넘어가질 못해. 과민반응. ?

 

석율: (일어나서 준식 쪽을 바라보며) 왜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 보통 사람들이랑 절 다르게 대하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준식: 난 늘 같은데?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나한테 남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는 건 너야. (관객을 바라보며) 사람이란 사실 흐릿한 존재일지도 몰라. 타인이 긋는 선이 날 정의해 주지. 나는 그저 나인데, 누구한텐 친근한 사람인 반면 누구한텐 천하에 나쁜 놈으로 그려져.

 

석율: 늘 같다구요? 전혀 다른데요, 그 누구들과 달리 전 수단이잖습니까, 이용하기 쉬운 셔틀...

 

준식: 그런 쪽의 일관성 말고.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내 아래에 있으면 그렇게 대할 거야. 이런 쪽으로 같단 얘기지. 넌 나에게서 특별한 대우를 바라고 있어. 바라는 게 있으니까 그냥 못 넘기는 거고.

 

석율: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당연한 걸 원했을 뿐입니다. 이끌어주고 서포트해주는 관계요. 김대리님과 장그래같은 관계 말입니다.

 

준식: (웃음을 터뜨리며) 하이고, 김대리? 걔 그러는 거 자아도취야.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석율아, 여긴 말이야. 우리가 몸담은 곳은.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니 인간관계에 마음을 많이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 덧없어. 난 널 이용하고, 너도 주변머리가 있다면 날...

 

석율: ! 그만 두십쇼. 성대리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힘이 빠져요. 의욕이 없어져서 살기 싫어진다구요.

 

석율, 의자에 걸쳐진 윗옷을 벗겨 팔에 걸치고 퇴장한다.

 

준식: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빈정거리듯) 참 귀여워, ?

 

준식,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정자세를 취한 후 사원증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앞을 주시한다.

준식; 나도 저랬었던가? (낮은 목소리로) 기억이 나지 않아. 사회에 뛰어들고 나서는 자잘한 감정에 대한 기억들이 흐려졌어.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차를 타고 달리는 것처럼 눈에 들어오는 게 달라졌어. 내 주변은 그저 흘러가는 풍경일 뿐이야. 흐름, 가야 할 발걸음, 쓸만한 것과 버려야 할 것들.

 

불이 꺼진다.

 

S#2

석율이 무대 오른편 원탁 위에 앉아 의자에 앉은 동기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무대 왼편 책상 앞에 준식이 앉아 서류를 넘겨보며 집중하고 있다.

 

석율: (방백) 감정은 기울기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어. (동기들에게) 그래서 성대리님이..

그래: 그래서 성대리님이.

백기: 또 성대리님이?

석율: (방백) 고장났다는 건 알지만 걷잡을 순 없어. (준식 쪽을 보며) 고작해야 대리인데 강하면 얼마나 강해서!

영이: 강하죠, 한석율씨보다는.

그래: 이길 수 없을 땐 시간을 두고.

백기: 아니, 꼭 이겨야 합니까?

석율: 기면 기고!

그래: 아니면 아니라구요? 흑백은 바둑에서나 갈리는 거죠.

 

동기들 자기 물건 챙겨 일어나서 퇴장, 석율은 원탁에서 뛰어내려 불안하게 서성댄다. 준식 뒤에까지 다가갔다가 물러나고, 무대 위를 배회하며 손톱을 씹는다.

 

석율: 과하게 의식하고, 필요 이상으로 살피고 집중하고, 별 말도 아닌 것에 의미부여하고자기 방어를 위해 작동해야 할 시스템이 스스로를 파먹는 알레르기. 머릿속은 어느 새 저 사람으로 가득 찼어. 한순간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바라보게 돼.

 

준식: (화면을 보며) 치료법은 회피. 항원과 최대한 접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이다. (의자를 석율 쪽으로 돌리며) 저런, 회사 생활에서 그게 되나.

석율: (다가서며) 불치병이네요.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방백) 의식해버리고 나면 마음은 평정을 잃고 정신없이 기울어. 그래서 나비날개짓 정도 되는 작은 액션도 폭풍우가 되서 날! 후려쳐!!

 

두 사람을 비추는 조명만 남기고 암전.

 

석율: 지금 한 말씀은 무슨 의미십니까. 공격입니까? (찌푸리며 돌려 앉으려는 의자를 다시 돌려 자신을 보게 하며) 아니면 제 과민반응인가요.

준식: 숨 못 쉴 때부터 강박적인 거 알아 봤다.

석율: (방백) 흐려지는 판단.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에서부터 모든 불안은 시작된다. 그럼 세상이 불안하게 흔들리게 돼. 그래서 불안해진 사람은 곧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허리를 굽히고 준식의 의자 팔걸이에 두 손을 올려 기대며) 일부러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미우신 것 아닙니까. 절 매장시키시려고...!

준식: 글쎄, 어떻게 생각해? 웃는 얼굴, 다정한 말투 속에서 본심을 찾아 봐.

석율: 미쳐버리겠네.

준식: 치료법 중엔 면역 요법도 있어. 항원에 익숙해져서 과민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환상을 버려. 패턴을 봐. 난 너에게만 특별대우하지 않아. 한결같지. 달면 삼키고, 쓰면.

 

준식은 바퀴 의자를 뒤로 빼고, 손을 짚었던 석율은 휘청거린다. 준식은 원래대로 일에 집중한다.

 

석율: 이상하네.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고개를 들며) 면역이상이 아니라, 과민반응이 아니라, 정말 유해한 물질이라 모든 반응이 유의미한 편이 차라리 낫겠어. 성대리님.

준식: 석율아~ 커피.

석율: 성대리님. 저 보세요.

준식: , 또 왜.

석율: 절 미워하십니까.

준식: 아오!!!

 

불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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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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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은 쇳소리 섞인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들었다.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진 호흡을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준식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어 뒤통수만 동그마니 보였다. 베갯잇을 손 안에 말아 쥔 채 크고 깊게 숨을 들이키느라 붉은 자국이 가득한 등이 오르내린다. 석율이 몸을 빼자 그대로 드러난 엉덩이가 불규칙하게 흠칫거렸다. 석율은 막 사용한 콘돔을 묶어 쓰레기통에 던진 후, 무거운 몸을 침대에 털퍽 쓰러뜨리고 모자란 숨을 보충하려 헐떡였다. 엇갈리는 두 개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나자 그는 입을 열었다.

 

전 대리님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섹스 후에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

그들의 섹스는 이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사고였다. 프로젝트 구상 단계에서 석율은 사수인 준식이 자기 아이디어를 갖다 썼다며 불만을 표했고, 준식은 우연인데 시건방지게 얘기한다며 화냈다.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석율 때문에 결국 회의실 안에서는 고성이 오고 갔다. 문과장은 내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일단 윽박질렀다. 으레 그러하듯 성준식을 달래고 한석율을 나무라며 다툼을 진정시킨 후 눈도 안 마주치는 부하직원들에게 퇴근 후 화해의 술자리를 제안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요즘 성준식은 업무가 많아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한석율은 엄마가 형만 편든다고 화내는 둘째처럼 불만이 가득한 상태라 과음을 했던 것이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모텔에서 눈을 떴는데 경악스럽게도 완전히 탈의 상태였다. 일반적인 남자 둘이라면 그렇게 경악스러운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한석율의 성 취향이 소수자라는 것이고, 성준식도 그걸 알고 있으며, 간밤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몸 상태와 방 상태였다. 그러나 이 사고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시간은 없었다. 두 사람은 9시를 십 몇분 남겨 놓은 시간을 보고 2차로 경악했다. 다행히도 그들이 투숙한 이름 모를 장소는 회사 코앞이었다. 허둥지둥 뛰쳐나와 엉망인 상태로 출근해서 회사에서 양치를 하고 머리에 물을 쳐바른다. 야근을 대비해 한 개씩 가져다 놓는 셔츠와 양말을 바꿔 입고 신었지만 일이 될 리 없었다. 석율은 10분 단위로 발작하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내가 성대리랑?! 미친!! 성대리잖아, 그 성대리! 으악!!’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한편, 준식은 파드덕거리는 뒷모습을 이따금 돌아다보며 다리를 떨었다. 그는 점심시간에 부사수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

석율은 퉁퉁 부은 채 굉장히 마뜩찮은 표정으로 옥상 문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한석율.”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와 날카롭게 노려보는 눈을 보자마자, 석율은 현실적인 고민에 빠졌다. 일이 재미없게 될 것 같았다. 석율은 강요하거나 폭력적인 타입이 아니었으나 간밤의 일은 기억이 없었고, 준식이 성폭행으로 몰고 간다면 동성 간이라 할지라도 상황은 성기를 삽입당한 상대보다는 삽입한 자신에게 훨씬 불리했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성준식이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릴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다 공론화시키지 않는대도 앞으로 몇 년간은 내내 잡힐 꼬투리가 될 것이다.

 

뭐라고 하지. 죄송합니다? 안 돼. 사과하면 내 잘못이라고 몰려.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말을 꺼내려던 준식은 벌써 딴 생각에 빠진 석율의 상태를 눈치 채고 찌푸리며 손등으로 가볍게 뺨을 쳤다.

 

아얏!”

정신 차리고 내 말 똑바로 들어.”

“..., , 말씀하십쇼.”

똑바로 말해. 어쩌다 너랑 내가 잤... 그렇게 된 거야?”

 

단어를 고르며 몸서리를 친다. 평소에 꼴보기 싫어서 늘 의식하고 있던, 거기다 동성인 부사수와 성적인 관계를 가졌음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저도 취해서 정확히는 기억이.”

 

준식은 입 안으로 우물거리는 대답에 급격하게 분노를 터뜨렸다.

 

정치인이냐?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다냐고! , 이거 성폭행이야 이 새끼야.”

, 성폭행요? 취해서 일어난 일인데 상호 책임 아닙니까?”

상호 책이임?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네가 그 쪽이고 난 아니면, 조심도 네가 해야 맞는 거 아니냐? 막말로 네가 게이 새끼 아니었으면 안 일어날 일 아니냐고. 너 내가 이거 그냥 안 넘어가.”

 

역시 재미없게 돌아간다. 석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경멸감을 드러내는 말투에 화가 나는 건 둘째치고, 아무리 머릿속에서 그물질을 해 봐도 기억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대신 상대방도 기억이 없는 것 같으니 무리수를 던지기로 했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에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은 없으므로.

 

성대리님, 사실은요.”

, !”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아니면 기억 안 나시는 척 하시는 겁니까.“

이게 또 무슨 개소리야.”

사실은... 대리님이 저한테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웃기고 있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도 취하셔서 그런 줄 알았는데 한 번만 자자고 매달리셨지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 접겠다고 눈물까지 보이시면서 안기니까 할 수 없이.”

 

준식은 석율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화가 나서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지금 어디서 수를 쓰고 있어, ? 그런 적 없어! 너 미쳤냐?”

정말 기억 안 나시나 보네요. 아침에 보니 후회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기억 안 나는 척 했는데, 성폭행이라고 몰아가시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석율의 표정은 확고했고 말투는 차분했으며 시선도 똑바로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혼신의 연기였으나, 태도가 진실한 탓에 준식도 좀 흔들렸다. 말마따나 기억이 거의 없어서 절대 아니라고 백퍼센트 확신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감정은 부끄러운 게 아니잖습니까.”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으시면 저도 그냥 잊은 척 하겠습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느라 준식의 시선이 방황하는 동안, 석율은 인사를 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인사과에 가야 해서 이만.”

 

그는 옥상에 준식을 남겨 놓은 채 나왔다. 준식은 그 자리에 선 채 기억을 곱씹었다. 술 마신 것 까진 기억이 나고, 문과장이 먼저 집으로 갔고, 그리고...? 거기서 필름은 끊겨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돌아봐도 성적으로 좋아해서 욕망한 적 따윈 없었다.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던 것 같다. 뭘 하는지 시시때때로 살폈고 굳이 괴롭히고 나서는 풀이 죽어 침울하게 앉은 걸 보며 은밀하게 기뻐하곤 했다.

 

이게 설마 좋아하는 감정인가.’

 

잠시 스스로에게 의심을 가졌던 준식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럴 리가. 이 자식이 면피하려고 거짓말하는 거야. 괘씸한 새끼. 요딴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그는 여전히 뻐근한 허리와 더 아래쪽 부분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분노했다. 당장에는 열이 뻗쳐서 몰아붙였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서 상대가 저렇게 나오면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별이 달라 한 쪽이 약자인 입장도 아니고 술도 같이 마셨으므로. 화가 치밀어 숨을 씩씩거리던 준식은 눈을 굴리며 다른 방향으로 골릴 궁리를 했다.

*

석율은 또다시 소회의실로 호출이 되자 한숨을 푹 쉬었다. 뭐라고 해도 아까의 입장을 견지할 생각이었다. 결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사수를 마주한 석율은 아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고 경계심에 차서 입술을 꾹 눌렀다.

 

왜 또 부르십니까, 대리님.”

석율아,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든 준식은 책상을 손 끝로 톡 톡 치며 석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널 좋다고 할 이유가 없어.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야 취중에 나오는 거잖아.”

저야 대리님 감정까지 알 수는 없죠.”

사실은 나도 살짝 기억이 났는데.”

 

그 말에 보일 듯 말 듯 어깨가 흠칫 떨리고 시선도 흔들린다. 저럴 줄 알았지. 석율 역시 기억이 없어서 확신이 없음이 분명했다. 준식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 ?”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뜬다.

 

네 마음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나한테 덮어씌우고 싶었던 거지. 이해해.”

아닙...!”

석율아, 네가 날 이 정도로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게 내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형태에요~ 그러니까 마음 접어.”

 

준식은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곁눈질로 부사수를 살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지 입을 뻐끔거린다.

 

, 저 대리님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요? ... !!!”

, 그래애? 그런데 그런 말은 왜 했어.”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확실해? 난 기억하는데.”

......”

기억 안 나는 척 하고 싶으면 어쩔 수 없고. 하여간에 나 포기해. 형은 이쁜 애기들, 섹시한 언니들이 좋은 사람이야. 어둠의 세계에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고오~ ?”

아아 아니 진짜로! 그게요! 어둠의 세계? 끌어들...? ??”

 

어디서부터 따져야 할지 막막해서 석율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준식은 후욱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틋한 듯 석율을 보았다.

 

나 좋다는 놈을 구박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아니라고요!!!”

그래 아니다, 아니라고 쳐.”

 

준식은 석율을 뒤에 남겨두고 먼저 나갔다. 석율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썼던 수에 그대로 당하고 있을 확률이 99퍼센트였지만, 역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남은 1퍼센트의 만약에때문에 자신감 있게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고, 이마를 화이트보드에 쿵 박았다.

*

석율은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스무 번도 넘은 것 같았지만 신경이 쓰여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곱슬곱슬 머리카락이 춤추는 뒤통수를 노려보고, 고개를 돌려 노트북 화면을 보며 어영부영 일을 하다 다시 휙 돌아본다. 스물 한 번째로 고개를 돌렸다 노트북으로 시선이 돌아온 순간, 사내 메신저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성준식 대리님: 좀 부담스럽다, 석율아. 나 포기해.]

 

아니라고오오!!! 석율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준식은 머리를 쥐어뜯고 고개를 처박는 부사수의 뒷모습을 보고 지갑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심 상태로 멍하니 책상 줄무늬를 세던 석율은 옆에 놓이는 커피컵을 보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탕비실 종이컵도 아니고 무려 싸제(?) 카페의 컵이었다. 돈 주고 사온.

 

이게...?”

 

얼빠지게 죽을 때 다 되신 거 아닙니까. 라고 물으려던 석율은 정신을 겨우 수습했다. 사고를 치고 아직 주인에게 들키지 않은 강아지마냥 눈치를 보며 한 모금 마신다.

 

감사합니다.”

나 잊고 좋은 여자, 아니 남자 만나라.”

푸업!!”

 

커피는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기도에 잘못 쏟아졌다.

 

크헉...콜록콜록, 아니라고요! 진쯔!!!”

알았어, 아니야. 알았다니까.”

...!!”

 

홧병으로 기절할 것 같이 열이 올랐던 석율은 다음 순간 백퍼센트로 확신했다. 만약의 확률은 없었다. 자신은 고백 따윌 한 적이 없을 것이며, 사수는 자신을 놀리며 괴롭히는 것으로 울분을 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 그러고서야 성준식 성질에 침착하게 난 네 맘 못 받아줘 운운에, 잊어라 운운, 거기다 커피까지 자기 돈 내고 사 올 리가 없었다. 이러시겠다 이거죠. 석율은 조용히 컵을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

문과장은 실무직에게 부하직원들의 행방을 묻고, 고개를 젓는 대답에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어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글쎄요...”

 

어제 분위기 안 좋더니 아직도 그렇구나 판단한 문과장이 둘을 어떻게 화해시킬지 고민하는 사이 그는 평소에는 성준식과 한석율의 사이가 괜찮다는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사수 부사수는 소회의실에 들어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성대리님, 사실은.”

 

준식은 부사수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몸을 똑바로 하자 멈칫했다.

 

사실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전 대리님을 좋아합니다.”

?”

 

목소리 끝이 뒤집어진다.

 

항상 대리님을 생각하고 있어요. 얼굴 보면 미치, 미치겠습니다.”

 

준식은 석율이 다가오는 서슬에 얼굴을 굳히고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눈길이 이글이글 정열적이었다.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내리고 나지막히 속삭이며 가까이 온다.

 

몸이 뜨거워져요. 옷 꽁꽁 챙겨 입은 거 보면 머릿속으로 벗기고 있어. 당신이랑 하고 싶어서허.”

아오 씻빨 이 미친 도라이새끼!’

 

자기도 모르게 혐오 표정을 지어 버린 준식은 황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여기서 티를 내면 지는 것이었다.

 

네가 했던 말 사실은 다 기억하고 있었네?”

제가 했던 말이라구요?”

그래. 석율아, 어젠 형이 술김에 맘이 약해져서 그런 거고, 너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마음 접어. ~ 나 좋다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냐.”

 

선생님, 사수를 때리면 왜 안 되나요? 초자아에게 자문하며 주먹을 꾹 쥐고 자신을 억누른 석율은 은근하고 느끼하게 말을 이었다.

 

술김에 약해지시는 거면 한 번만 더 받아 주세요.”

...”

 

등이 벽에 부딪혔다. 준식은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떴고, 그 짧은 사이 석율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이 사악한 새끼가... 이래도 뻥인 걸 인정 안 해?’

여기서 뻥이라고 하면 소시오패스 앞에서 내 입지는 끝인데.’

 

각자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입술이 닿았다.

*

으악 진짜 키스했어. 석율은 기겁하며 입술을 뗐다. 준식은 눈썹 사이에 깊게 골이 패일 정도로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며 검은 눈동자가 드러난다. 놀라서 홉떠진 두 시선이 부딪혔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서로 재수없게 여기던 상대인데 금방 닿고 떨어진 온기가 아쉬웠고, 숨겨져 있던 코드가 일치한 것처럼 다시 입술이 닿았다. 목이 말라오듯 상대의 촉감이 부족했다. 석율은 눈을 감고 고개를 꺾어 키스하며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차렷 자세로 떨어져 있던 준식의 두 손이 석율의 등을 마주 안았다. 방어적인 입술만의 키스는 안쪽까지 들어가 예민한 부분의 감각을 나누는 깊은 것이 되고, 석율의 허벅지는 준식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떨어지자마자 아쉬워 다시 혀를 빨고, 턱 아래를 핥던 석율은 갑자기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깨닫고 경직되었다. 그는 몸을 뒤로 빼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꺼풀만 감았다 떴다. 자신은 확실히 욕망을 느꼈다. 아까까지 거짓말이라고 백퍼센트 확신했던 자신감이 약해진다.

한편, 준식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좋아한다는 게 오기와 뻥이 아닌 진짜였나, 아님 이것도 오기의 연장선인가, 자신은 방금 왜 그랬는가를 번갈아 생각하느라 시선이 정신없이 방황했다.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전 성대리님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자자고 했다는 것도 뻥이지?”

제가 고백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시죠.”

“......”

거짓말이죠, ?”

 

준식은 버릇대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석율이 즐겨 바르는 딸기향 립글로스의 맛을 제 입술 위에서 느끼고 당황했다. 석율은 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회의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두 사람은 오래 이석한 것에 대해 한 소리 들었다. 전날부터 시작해서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데다 몸도 찝찝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준식은 상황이 허락하자마자 얼른 퇴근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기둥 뒤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식겁한다.

 

성대리님.”

아 씹 깜짝이야! !”

저 성대리님 댁에 가도 됩니까.”

네가 우리집엘 왜.”

전 정말 아무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한번만 더 뭐. 말을 끝까지 해.”

한번 더 자자구요.”

 

준식은 차 문을 세게 닫고 뒤를 돌아섰다. 아침에 느낀 황당함과 분노가 다시 밀려와 치켜뜬 눈으로 노려본다.

 

미쳤냐? 내가 왜.”

제가 왜 그랬는지.”

너 왜 그랬는지 알게 해 주려고 나보고 뒤 대라? , 소시오패스 맞네 이거. , 자아성찰을 하려면 혼자서 곰곰이 생각을 해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비켜.”

어디 가시는데요?”

여친 만나러.”

여친은 무슨! 소개팅 하고 한 번 만나셨잖아요?”

, 이거 봐라? 그걸 어떻게 알아. 역시 나 좋아하나보다?”

그게 아니라...! 맨날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시니까!! 그리고 한번 자나 두 번 자나 뭐 다릅니까?”

 

준식은 마음 속으로 앞으로 이 대사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본인이 할 땐 몰랐는데 남의 입에서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다르지.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각자 내켜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똑바로 얘기해.”

“...똑바로 얘기하면 내키시는 건가요?”

내용 들어 보고.”

 

살짝 자포자기해서 아무 말이나 던지던 석율은 의외로운 반응에 긴장했다. 그는 최대한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제가 대리님을 좋아하는 건 절대, 절대 아닌데요. 그게, 신경쓰여서 죽을 것 같지 말입니다. 아까 키스했을 때도.”

때도.”

솔직히 좋...... 좋았, 좋았고.”

렉걸렸어? 왜 이렇게 더듬어.”

 

얄밉게 대꾸하며 거만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거절인 것 같았다. 아까 키스의 여파를 떨치지 못했던 석율은 고개를 숙였지만,

 

, 지은아? 오빤데. 미안한테 오늘 못 보겠다. 야근이야.”

 

그 자리에서 전화하는 내용을 듣고 고개를 다시 들었다. 전화를 끊은 준식은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화난 듯, 심란한 듯 가만히 석율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준식은 석율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석율은 열린 코트 안으로 들어오는 몸을 감싸 안았다.

*

제정신으로 하는 섹스는 굉장히 민망했다. 씻을 때도 그랬지만, 나와서 얼굴 마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발이 오그라붙을 것 같아서 괴로워진 준식은 엎드린 채 얼굴을 들지 않았지만,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던 혀가 생각지 못한 곳에 닿는 순간 놀라서 몸을 비틀어 뒤를 보았다.

 

너네 이런 것까지 해?”

너네가 무슨 말... , 그냥 가만히 계세요.”

 

으으으아아아으으. 준식은 베게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뱉었다. 희한하고 소름끼치는 기분이었다. 석율은 평소에 다다다 빠르게 수다를 떨어대던 모습과는 너무 다르게 말이 없었고 집요했다. 세운 혀 끝이 정성들여 애무한 후 대신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에도, 마침내 삽입했을 때도 그 소름은 점점 부피를 더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넣고 나서 아, 하고 낮게 터지는 탄성이 준식의 귀를 곤두서게 했다. 자연스러운 감각이 절대 아니었다. 뻐근하면서 그 곳에서부터 몸이 부식되는 기분이지만 쾌감은 확실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약간의 차이를 두고 엇박이 되어 흘러나왔다. 성준식의 어떤 체취, 어떤 촉감, 어떤 부분이 그를 미치도록 몰입하게 만들었고, 전날의 기억이 희미하게 무성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무게를 실어 추삽질을 하던 석율은 너무 빨리 가 버릴 것 같아 잠깐 몸을 뺐다. 준식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까까지 무언가 들어와 있었던 곳이 화끈해지면서 안쪽이 시큰거리고 저렸다. 석율이 한 번에 다시 넣자 곤두선 안쪽으로 자극이 몰려 올라왔다.

 

, !”

 

짧은 신음을 터뜨리며 뒤로 젖히는 등 가운데가 옴폭 파인다. 유두를 꼬집어 비틀자 파들거리며 조여왔다. 머리가 띵해진 석율은 숨을 섞어 겨우 말을 꺼냈다.

 

하아, 왜 여자랑 만나요? 너무나 이쪽이신데.”

입 닥쳐. 넌 왜 나한테 이래, 남자랑 박는 새끼들, , 넘치잖아.”

그러게요. 하나도 취향 아닌데.”

나도, , 취향 아니...”

 

준식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는 다시 시작된 추삽질과 그에 따라 감당할 수 없이 밀려오는 쾌감에 원래대로 얼굴을 묻었다.

*

전 성대리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지 말입니다.”

 

베개에 묻혀 있던 얼굴은 아직도 새빨갰다. 곱슬머리는 헝클어졌다. 준식은 물기가 남은 눈을 찌푸리고 석율을 노려보았다.

 

~ 그래. 자니까 확실히 확인이 되십니까?”

불확실합니다. 한 번만 더 하면 알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난 알겠는데? 넌 아니야.”

그것도 있다가 다시 생각해보세요.”

 

석율은 심술부리느라 얄팍해진 입술에 키스하고, 혀를 섞었다. 길쭉한 손이 그의 뒤목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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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

갈증

전력 60분 2015. 9. 18. 16:28

일을 다 끝내고 상큼하게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 한석율은 제 책상 앞에 선 채 멍해졌다. 분명히 평지였는데 자리를 비운 사이 서류철 더미가 층층이 쌓여 탑이 생겨 있었다. 서류철마다 지시사항이 노란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제 사수 성준식의 깔끔한 글씨체였다. 그는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몸을 돌려 준식을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짱한 얼굴로 볼펜 꼭지를 입에 대고 눈을 깜빡거리며,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성대리님.”

?”

이걸, 다요?”

~”

베트남 공장 시찰 건은 성대리님이.”

한석율씨.”

 

준식은 석율의 말허리를 뎅강 잘랐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검고 동그란 눈동자를 위로 굴려 빤히 쳐다본다.

 

.”

 

석율은 입술을 꾹 누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당한 업무 분배에 항의할 온갖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성준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 커피 한 잔만. 갈증나네?”

 

였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석율은 얌전히 앞으로 모두었던 손을 허리에 올렸다. 그가 그 자세를 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술을 조금 내미는 것은 지금부터 따지겠다라는 신체 신호였으므로, 성준식은 재빨리 한 번 더 선수를 쳤다.

 

오늘은 달달하게. 나 당 떨어졌다 썽뉼아.”

 

그리고선 쌕 웃는 얼굴은, 어이없게도 석율의 눈에 귀엽게 보였다. 그래, 좋아하는 쪽이 병신이지. 이렇게 이용당하고도 좋아하는 내가 호구지. 투덜거리면서 탕비실로 간 석율은 커피믹스도 원두커피도 싹 다 떨어진 것을 보고 더 성질이 났다.

 

다 먹었으면 좀! 채워놓든가, !”

 

탕비실 물품은 원래 총무과에서 일괄 지급하지만, 중간에 다 떨어졌을 경우 가지러 가는 일은 그 책임소재가 불분명했다. 화장실 휴지의 법칙처럼 마지막 쓴 사람이 채워놓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귀찮기 때문에 대부분 은근슬쩍 마지막 물품을 사용만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석율 역시 가지러 가기가 귀찮아서, 아래쪽 수납함을 열고 인스턴트 커피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바람에 오래돼서 좀 굳어진 크리머, 그리고 역시 오래되어 종이 포장이 노랗게 변해가는 각설탕을 끄집어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다 봐주고, 다 해주고, 그래야 하나? ?”

 

영감처럼 혼잣말로 불평하며 각설탕을 컵 안에 한 개 퐁 빠뜨리고, 서서히 녹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점점 짜증이 났다.

 

안 참아, 아니, 못 참아! 가만 안 둬.”

 

그는 팔짱을 끼고 가만 안 둘 방법을 곰곰 생각했지만 팀 막내에다 평사원 나부랭이에게 사수를 응징할 별다른 수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각설탕 껍데기를 한 개 더 벗겨 넣고, 녹는 걸 보던 석율은 눈을 반짝 뜨곤 또 한 개, 또다시 한 개를 까서 넣었다.

 

당 떨어지셨다구요? 슈가쇼크나 겪어 보시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개 더 빠뜨리고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

 

그래서 각설탕 5개 넣었는데 말이지~ 커피 맛 잘 아는 척 하더니 잘만 먹어. 입맛이 애야 애.”

 

영이는 휴게실 녹색 의자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석율을 보았다. 그는 책상에 걸터 앉은 채 손짓을 해 가며 종알종알 제 사수 뒷담화를 해 대느라 뺨까지 발그레해져 있었다.

 

그럼, 특집 난 상사한테 여기까지 해 봤다’, 이제 영이씨 차례.”

전 없어요.”

“...? 잠깐만.”

저도 없습니다.”

 

나란히 앉아 있던 백기가 일어나며 덧붙였다.

 

뭐야, 이러기야영이씨? 한 개씩 말해보자며!”

 

웃음을 간신히 참은 영이는 황망한 표정의 석율에게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한석율씨,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네요. 상사한테 당뇨병 병인이나 제공하고.”

? 아니 영이씨! 영이씨가 더 무섭...! , 백기씨, 이런 거 뭐라 그러지?”

보통 경박하다고 하죠.”

, 그거 말고. 뒷통수... 잠깐. 경박? 장백기씨까지 이러기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두 사람은 걸음걸이도 단정하게 또박또박 가 버리고 말았다. 혼자 남겨진 석율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분통을 터뜨리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 ! ~ 이 사회가 이렇게 무서워.”

그럼, 무섭지. 어디서 누가 들을지 모르거든.”

 

뒤에서 선명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석율은 등 가운데서부터 목 뒤까지 서늘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안절부절 몸뚱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동안 발걸음은 토박토박 석율의 뒤를 스쳐 앞에 와서 섰다.

 

"그래~ 우리 썽뉼이가 사수 맛있게 먹으라고 각설탕도 다섯 개나 넣어주고. 그렇구나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두 사람은 서로의 양상에 대해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성준식이 과하게 다정하게 말하는 것은 공격신호였다. 석율은 할 말이 없어 바닥을 보았다. 숨 막히는 침묵의 몇 초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준식이었다.

 

"썽뉼아?“

", , 대리님...“

"커피 한 잔 타 와 봐. 몸에 좋게.“

"."

 

그 자리를 벗어날 일념만으로 경보 수준으로 걸어나온 석율은 제 부서로 얼른 올라가 탕비실로 들어갔다.

 

아오. 시발. 있으면 티를 좀 내든가.’

 

본인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휴게실에서 흥분하여 크게 떠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성준식을 원망하던 석율은 손을 멈추고 검은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

 

성준식은 제 책상 위에 놓이는 컵을 집었다. 천천히 들어올려 입술에 가져가며 곁눈으로 석율의 반응을 살핀다. 손을 꾹 쥐었다 폈다가, 눈동자가 흔들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바운더리 안에 든 사람에게 해 끼치는 것에는 죄책감이 강한 한석율이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얼굴에 매우 티가 난다. 그가 모른 척 입술을 대자, 결국 석율은 참지 못하고 컵을 빼앗아 갔다.

 

?”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석율은 질책하듯 가늘게 뜨고 보는 눈을 피해 황급히 윗옷을 집어 들고 나왔다. 발끈해서 커피에 침을 뱉으며 몸에 나쁠 거 없잖아, 그냥 아밀라아젠데.’라고 합리화했지만 결국 셀프 설득은 실패였다. 그는 성준식이 선호하는 캬라멜 마키아또를 잽싸게 사 와서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 결재를 기다리듯 손을 공손히 모으고 앞에 선다.

 

너 먼저 마셔봐.”

 

준식의 목소리에는 이미 의심이 꽉 차 있었다. 석율은 쭈뼛쭈뼛 리드를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액체가 목구멍까지 꼴깍 넘어가는 걸 관찰하고 나서야, 준식은 커피를 받아 마셨다. 석율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매우 불편하게 자리에 앉아, 이등병처럼 정자세로 일을 재개했다. 몇 분 후, 평온한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불렀다.

 

한석율씨. 내일은 자바칩 프라푸치노.”

예이...”

 

석율은 지은 죄가 있어 반항도 못 하고 대답했다.

 

*

 

요즈음 일은 계속 바빴다. 섬유팀이 관리하던 공장 중 일부는 대서양 물산과의 합작 법인 설립과 함께 그쪽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 날도 야근 확정이었고, 문과장은 윗선과 회식을 빙자한 회의를 가고 없었다. 석율은 피곤에 찌든 채 기지개를 켜다가, 성준식과 눈이 마주치고 얼른 손을 내렸다. 오전에 자신의 행동을 들킨 후 그는 아직까지 준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피곤해?”

, 아닙니다.”

피곤하잖아. 커피 한 잔 타줄까?”

????”

 

석율은 그의 말에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아프세요?”

, 넌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싫음 말고.”

그게 아니라, , 좋은데.”

 

석율이 말 끝을 흐리자 준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사라졌고, 잠시 후 커피잔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

 

석율은 코 밑에 디밀어진 종이컵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복수? 비꼼? 확률은 낮지만 순수한 호의? 뭔지 판단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자 준식은 짜증을 냈다.

 

안 받아?”

 

손에 쥐어 주고 자리에 앉는다. 석율은 종이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지만, 곧 뗐다. 자신이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곁눈으로 보고 있는 게 수상했다.

 

“...솔직히 말해 보십쇼. 대리님, 여기 뭐 넣으셨죠.”

, . 내가 너야? 말 하는 거 보니 아까 뭐 넣었었구만. 어쩐지.”

.....그게.”

그런 짓 안 하니까 마셔, 마셔.”

 

손짓을 까딱 하며 마시라고 종용한다. 석율은 할 수 없이 컵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시며, 컵 너머로 눈을 굴려 준식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안 넣었는데도, 맛있지?”

“.....예에....”

 

찝찝하게 대답하느라 어두워진 표정을 관찰하던 준식은 낄낄 숨을 들이마시며 웃음을 터트렸다.

 

당최 못 숨겨. 멀었어, 한석율.”

왜 웃어요! 역시 침 뱉으셨죠?

뭐하러?”

 

준식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석율의 멱살을 잡아 끌었다. 커피로 쓴 맛이 나고 촉촉해진 석율의 혀는 준식의 혀와 엉켰다. 매끄럽게, 표피가 아닌 안쪽부터 오싹하는 근질거림이 밀려 올라와 코로 단 숨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서로 다 왔다 갔다 했잖아.”

 

석율의 입 안에서 혀를 빼내고, 입술을 적시며 말한다. 석율은 입 안에 고인 액체를 목 안으로 넘기고, 얄밉게 웃는 보조개진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다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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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

2015. 8. 17.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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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식은 지금껏 타인을 볼 때 어떤 점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일지를 중점적으로 살펴 왔다.이용가치가 있는가, 이용하기 용이한가, 어느 선까지 이용할 수 하는가.

 

그래서 사람 전체를 면밀히 관찰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대상은 자신한테 반기를 들었던 제 부사수였다. 처음에는 석율이 소중히 여기는 것 뒤집어 말하면 약점 - 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으나, 그것은 곧 버릇과 비슷한 것이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공적으로 보여주는 페르소나가 있게 마련이지만, 한석율의 그것은 남들보다 유난히 공고하고 몸에 밴 것이었다. 옛 공포극에 나오는 가면처럼 너무 오래 쓰고 있어 얼굴에 녹아 붙어 버린 듯, 페르소나와 실체는 경계가 흐려지고 섞여 한석율이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준식만은 그 가면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동안 준식 앞에서 석율이 가면을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립 이후 숨기기를 포기하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반감과 상처받은 감정,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끈질기게 살피는 시선까지.

 

둘 사이에서 끊어지지 않던 서로에 대한 의식은 단 하나의 스위치로 끌림이라는 감정으로 전환되었고, 현재 두 사람은 뜻밖에도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 서로에게 다정하거나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타인 앞에서는 나오지 않는 표정, 눈빛, 흔들림과 나약함은 보이는 기묘한 사이였다.

 

 

오후 4시 가량이 되면 업무에 쓰이던 머리가 과열되어 돌아가기를 멈추곤 한다. 준식이 상체를 뒤로 기대고 기지개를 켜자, 석율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갔다. 파블로프 반사처럼 장기간에 걸쳐 습득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과장과 준식에게 한 잔씩 가져다 주고, 실무직 여직원에게도 눈이 접힐 정도로 미소 지으며 갖다 준 후 담배를 피운다는 명분으로 잠깐 자리를 비운다. 준식은 주변을 살폈다. 이 무렵이면 과장 역시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옆 팀과 잡담하는 타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뻔한 장소로 갔다. 점심식사 후 한 번, 이 무렵에 한 번, 하루에 두 번 석율이 동기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 층 위 연결통로에 서자 유리창 너머로 벤치에 앉은 한석율과 그 옆에 앉은 안영이, 그리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채 담배를 문 장백기가 내려다보였다. 석율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특유의 요란한 손짓을 하고, 영이는 웃음을 터뜨렸으며 백기는 인상을 썼다. 좌우로 굴러가는 눈동자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기울이는 귀여운 척, 무언가가 의심스러운지 눈을 가늘게 뜨는 변화무쌍한 표정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던 준식은 석율이 고개를 드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석율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행동을 멈췄다. 그의 표정 변화에 두 동기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을 두 번 깜빡인 석율은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와 준식에게 끄덕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동기들의 팔을 찔러 주의를 돌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준식은 커피를 다 마시고 손 안에서 종이컵을 구겼다.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컵은 튀어나와 바닥에 굴렀지만,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후 발걸음을 재촉했다.

 

 

 

 

*

 

한석율, 여기 계약서 조항, ‘local court’ 이거 애매하잖아! 중국애들이 자기네 법으로 우기면 어떡할 거야? 독박 쓸 일 있어? ‘in the court of Korea’로 바꿔.”

금방 고치겠습니다.”

 

언성을 높여 나무라는데도 석율이 순순히 출력물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뜬다.

 

이제 안 틀릴 때도 되지 않았어? 은근히 허술해.”

그래서 성대리님 가르침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넉살좋게 대답하며 귀여운 척 웃던 석율은 대놓고 빤히 응시당하자 표정을 조금 흐렸다. 검고 동공이 큰 눈동자가 석율의 양 눈동자를 들여다보느라 미세하게 움직이고, 미간이 찌푸려진다. 다른 사람의 표정을 잘 읽는 석율이지만 성준식의 경우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 때가 많아 난감했다. 이럴 때 를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을 체득하여 알면서도,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애매한 말투로 묻고 애써 웃는다. 준식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율아, 나 좀 보자.”

 

강아지를 부르듯 까딱 손짓을 한다. 고개를 갸웃한 석율은 그의 뒤를 따라 탕비실로 갔다. 불러 놓고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뚫어져라 보는 바람에, 석율은 몹시 불편해서 입술을 깨물었다가 미간을 좁혔다.

 

성대리님, ...”

 

그는 알면서도 결국 또다시 물었다, 말없이 응시하던 준식의 손이 두 뺨을 감쌌다. 다른 뜻으로 오해하고 눈을 감았던 석율은 아주 아프게 양 볼을 꼬집히고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두 뺨을 손가락으로 잡고 탈탈 흔든다.

 

~~~아허혀!!”

 

손이 떨어지고, 석율은 빨개진 두 뺨을 문지르면서 황당한 듯 준식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쓴다.

 

왜요? 뭡니까?”

 

준식은 대답 없이 재차 팔짱을 끼었다. 못마땅할 때의 버릇으로 입술을 좀 내밀고 있다.

 

저 뭐 잘못했어요?”

“......거슬려.”

뭐가요?”

네 얼굴.”

??”

 

어이없는 대답에 잠시 황망해하던 눈빛은 의심으로 짙어졌다.

 

뭐가 말입니까? 설마 잘생겨서요?”

내가 더 잘생겼지.”

에이, 그건 진짜 아니...! 뭐야, 수상해. 뭔데요? 뭐지?”

그냥 그렇다고.”

, 뭔데요오~”

 

눈썹을 팔자로 떨어뜨리고 말 끝을 늘이던 석율은 준식이 돌아 나가자 뒤를 따랐다.

 

뭡니까 진짜? ? 대리님!”

 

준식은 징징거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뒤따라온 석율은 등 뒤로 철문을 밀어 닫았다. 무시당해서 짜증이 돋은 얼굴은 붉어지고, 눈은 마음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일렁거리고, 똑바로 주시하는 시선에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사회적 표정은 한 치도 없었다.

 

석율은 제 사수가 슬쩍 웃는 것을 보고 의아함에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진짜 성격 이상하시지 말입니다.”

 

대놓고 하는 지적에 언짢아하기는커녕 보조개가 들어갈 정도로 확연히 웃는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를 희한한 반응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석율은 준식의 손길에 움찔 물러났지만 아까와 달리 두 손은 뺨을 감쌌고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석율은 피부 위로 희미하게 숨결이 느끼고 본능적으로 일단 눈부터 감았다가 아니지 싶어 떴다. 그리고 역시나 통통한 귓불을 아프게 깨물렸다.

 

...!”

 

어깨를 움츠리고 눈물이 도는 눈으로 노려보디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쉰다.

 

진짜 성격....”

두 번 말하지 마.”

이상하지 말입니다.”

 

제 명령을 무시하고 끝까지 하는 말에 준식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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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2015. 8. 9.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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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은 외근에서 돌아오자마자 재킷을 벗었다. 입고 있는 수트나 셔츠 모두 얇은 여름 소재였지만, 그래도 작열하는 습한 날씨에 두 겹이나 껴입고 있는 게 덥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는 습기로 인해 몸에 달라붙은 와이셔츠를 손가락으로 잡아떼고 에어컨 바로 아래 가서 섰다. 몸을 달군 늦은 오후의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헐떡거리며 뜨거운 숨을 내쉬는 소리를 듣고, 성준식은 의자를 돌려 그를 보았다. 


“밖에 많이 덥나 봐?”


긴 셔츠를 깔끔하게 입고 타이까지 한 성준식이 아이스컵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며 얄밉게 질문했다. 석율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흐린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누구 덕분에 더 덥지 말입니다.”

“누구 덕분인데?”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미소짓는 얼굴을 보고, 석율은 자제심을 잃고 낮은 소리로 그를 성토했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대리님 때문이잖습니까!”

“이건 내가 만만한가, 툭하면 나 때문이래. 야 한석율, 날씨 더운 것도 나 때문이야?”


능숙하게 논지를 일탈하며 상대를 병신으로 만드는 대화의 흐름을 느끼고, 석율은 말리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

몇 시간 전, 작열하는 날씨에 외근 나갈 생각으로 쳐졌던 석율은 문과장으로부터 반가운 한 마디를 들었다. 


“한석율씨, 날도 더운데 꼭 다 챙겨 입을 필요 없잖아. 그거 입어, 그거.”


문과장이 지칭하는 ‘그거’란, 얼마 전에 거래처로부터 받은 반팔 와이셔츠였다. 그들의 회사는 상사였기 때문에 외부 사람과 만날 일이 많아 여름에도 정장을 꼭꼭 챙겨 입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 시책과 관련하여 냉방 온도가 높아지면서 사내에서는 은근슬쩍 반팔 와이셔츠를 정장 재킷 아래 입거나, 허용해 달라는 여론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래 뭐, 요새 누가 그렇게 챙겨 입나?”


반가운 마음에 처박아두었던 셔츠 상자를 끄집어내려던 석율은, 성대리로부터 태클을 당했다.


“과장님, 그게.... 아무래도 반팔 차림은 신뢰도를 좀 떨어뜨리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지.”

“계약 컨디션을 조금이라도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조정해야 하는데, 좀 덥더라도 회사 이미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반팔은 좀 그렇죠.”

“그렇지, 응, 역시 우리 성대리가 생각이 깊어. 한석율씨, 덥더라도 좀 참고 갔다 와”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양 순수한 얼굴로 문과장을 설득한 준식은 석율 쪽을 보고 슬쩍 웃었다. 


“고생해, 한석율씨.”


석율은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단순하게 가벼운 차림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화가 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 뒤에 숨은 의도가 다분히 악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

며칠 전에 한석율은 성준식과 자고 말았다. 


예전 상황의 미러링이라도 하듯, 석율은 룸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취해서 건방지게도 상사인 준식을 전화로 불러냈다. 야근하다가 준식과 충동적으로 키스한 후 - 웃는 얼굴을 보고 느낀 감정이었으니 정말 충동이었다 - 지속적인 미움과 그에 대한 예민한 의식, 집중 같은 섞인 감정들이 한 쪽으로 물꼬가 트이듯 쏠려 나가면서 마음이 크게 요동치고 그 파문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밝혀내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리고 준식으로부터 더 이상 확실할 수 없을 정도의 답을 얻었다. 


키스는 성준식이 먼저 했지만. 그것은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 나머지는 자신이 주도해서 일어났다. 술김에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얄밉고 신경이 쓰여 끊임없이 의식하던 성준식을 안고, 목덜미와 가슴과 배, 그리고 더 아래를 마치 사랑스런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핥고, 급기야는 이성도 아닌 그에게 발현된 욕정으로 정신을 놓고 몰두하여 관계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술이 깨고 나서, 석율은 키스 후 내내 겪던 인격 분리, 특히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할 리 없다는 자기 부인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했다. 인정하는 순간 그는 초연해졌다. ‘난 매저키스트인가보다.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다.’ 가 그를 초연하게 만든 결론이었다. 


그러나 막상 다음날 출근하여 성준식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가 은밀하게 미소를 짓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 전날의 초연함은 사라지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울렁거렸다. 석율은 스스로에게 심하게 당황하여, 화닥거리며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탕비실로 사라졌다. 전날 보았던 준식의 표정과 몸의 느낌,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나서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석율은 하루종일 준식을 피했고, 눈을 마주쳐야 할 때도 눈동자를 굴려서 최대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피했는데 그 행동은 준식에게 모종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 상태로 퇴근 무렵이 되자 준식의 태도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석율이 얘기 좀 하자고 팔을 잡은 순간 예전처럼 말끔하게 꾸며진 표정으로 팔을 뿌리쳤다. 


“얘기는 나중에 하자.”


잡혔던 부분을 당겨 주름을 펴며, 준식은 석율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지겹다, 썽율아.”







*

그 때 이후로 계속이었다. 티나지 않도록 그가 석율을 괴롭히는 것은. 대략 그 행동의 원인을 짐작한 석율은 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으나, 준식은 폐쇄적인 태도로 다 잘라냈다. 그 상태가 며칠 동안 지속되자 석율도 화가 치밀어서 냉담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마치 회사를 떠들썩하게 했던 불륜녀 사건 이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성준식은 정말로 지겨워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과 욕망에 대해서만은 확실한 자신과 달리 한석율은 끝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자신한테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리광을 부리고, 다가왔다가는 물러나면서도 시선을 떨구지 않고 있었다. 어리광 받아주기가 귀찮아진 그는 다시 석율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스스로 어떻게든 결론을 내릴 때까지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아오, 더워 죽겠네.”


준식은 가방을 내려 놓으며 혼잣말로 성을 내는 석율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가와 입술은 준식에 대한 억하심정으로 새빨개졌고, 숨이 거칠어져 가슴은 오르락 내리락했다. 


시선을 모른 척 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고 소매를 걷던 석율은 가슴, 정확히는 유두를 꾹 찌르는 손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호악!!! ....뭐뭐 뭐 하시는겁니까!”

“섰다.”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리던 그는 작게 소리쳤다.


“익! 와 나! 이건 성희롱이지 말입니다!”

“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요?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요?”

“지겹다, 썽뉴라.”


석율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가 대거리를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문과장이 들어왔다. 석율은 재빨리 구두로 보고를 하고,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당겨 내리고 소매를 걷어 올린다. 준식은 소매 아래로 드러나는 팔과, 울분을 누르느라 요동치는 목울대를 흘낏 보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

문과장은 자리로 성준식을 불렀다. 심각하게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석율까지 불렀다. 


“한석율씨. 제이모직 다시 좀 갔다 와야겠어.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말이 바뀌어.”

“예..? 지금 말입니까?”

“아무래도 말 나온 김에 해결하는 게 낫죠.”


사또 옆에 선 이방마냥 이죽거리는 모습이 얄미웠다. 석율은 준식을 노려보며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문과장에게 건의한다.


“과장님, 아무래도 저 혼자 가는 것보다는 성대리님이 같이 가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건 한석율씨한테 전적으로 맡겨 달라면서.”

“제가 부족해서 자꾸 컨디션이 바뀌나 봅니다. 대리님이 좀 도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씨, 너 죽을래? 라고 입모양만으로 욕하는 준식을 보며, 석율은 혀라도 내밀고 싶은 심정으로 씩 웃었다. 






지하 주차장은 거대한 찜통 같았다. 냉방기의 혜택이 미치지 않는 데다, 지하인데도 낮에 갖혀 있던 지열이 끓어올라 습기와 어우러져 숨이 막혔다. 성준식은 일정에 없던 외근, 거기다 퇴근 시간에 임박하여 나가는 바람에 야근 확정인 외근을 하게 되어 단단히 부아가 치밀어 있었다. 석율은 옆에서 그러든가 말든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더위에 찌들어 정신이 혼미해진 채로 운전석에 올라타며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더워... 반팔 입고 싶지 말입니다.”

“무슨 반팔이야. 상사맨이 반팔 입으면 얼마나 없어 보이는지 몰라?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신뢰도가.”


화가 나서 똘똘 뭉친 목소리로 나무란다. 석율은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대리님이 반팔이 싫으신 거잖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나까지 끌어들여야 되겠어?

“아니지, 반팔이 싫으신 게 아니라 그냥 제가 미우신 거잖아요!”

“와... 지겹다, 너.”


석율은 세 번째 듣는 말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끝난 대화 때문에 침묵이 흐르는 속에서 시동을 건다. 






*

거래처와 같은 말을 지루하게 반복하며 누가누가 더 지긋지긋하고 끈기있나를 겨룬 끝에 나름대로 합의를 끌어낸 두 사람은 쳐진 상태로 회사에 복귀했다. 시간은 이미 퇴근시간을 한참 지나 밤이 되어 있었다. 석율은 새로 추가된 컨디션에 대해 보고서를 써야 했다. 


“간다.”

“수고하셨습니다.”

“어, 누구 덕분에 수고했지.”

“대답을 해도 꼭...”

“뭐 임마?”


준식이 인상을 쓰는 걸 보고 얼른 입을 다물었던 석율은, 그가 재킷 자락을 똑바로 당겨 입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재킷 아래 연한 푸른색 셔츠에는 흔한 땀자국 하나 없었다. 


“성대리님, 안 더우십니까?”

“난 원래 더위 안 타.”

“아, 예에...”


석율은 영혼 없이 대답하다 말고 뭔가 의심스러워져서 눈썹을 찌푸렸다. 겨우 두 번째 보는 것이긴 하지만, 성준식이 여름만 되면 늘 아이스커피를 빨고, 외근 나가기도 싫어하고, 하루 세 네 번은 탕비실에서 볼이 볼록해지도록 얼음을 오독오독 씹고 있는 걸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성대리님.”


석율이 자신을 따라 나와, 비상계단 문을 열고 손짓을 하는 것을 본 준식은 드디어. 하고 생각하며 숨을 고르고 갔으나, 예상과는 다른 일을 당했다. 





“이상한데?”

“뭐야, 왜 이래?”


준식은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고 넥타이를 푸는 손길에 기겁해서 석율의 턱읃 손바닥을 밀쳐댔다. 


“수상해. 이거 벗어 봐요.”

“미쳤냐? 또라이네 이거, 손 안 놔?”


두 사람은 아웅다웅 몸싸움을 했다. 석율은 벽에 준식을 밀어붙였다. 짜증이 폭발한 준식으로부터 정수리를 몇 대 얻어맞긴 했지만, 석율은 손끝도 야무지게 재빨리 단추를 풀었다. 


“헐, 뭐야. 더위 안 탄다면서요. 쿨팩 붙였어!”


준식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웃는 석율의 손을 잡아 치웠다. 


“아, 그래! 솔직히 덥다! 됐어? 손 치워!!”

“자기는 이래놓고 저는 반팔 못 입게 한 거에요? 저 엿먹이려고?”

“반팔 타령 좀 그만 해!”


화가 나서 목소리가 뒤집혀 있었다. 석율은 다시 단추를 채우려는 손을 잡았다.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이젠 그만 물어 봐. 지겹다.”

“....”

“내가 좀 묻자. 넌 왜 그러냐?”


석율은 준식과 눈을 마주쳤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이니까. 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준식이 지겨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더 자조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그럴까요, 진짜. 꼴도 보기 싫은데.”


석율은 쇄골 아래 붙은 얇은 쿨팩에 손을 댔다. 파스같은 재질의 그것을 떼어내자, 그 아래 피부가 조금 발그레해진 것이 보였다. 석율은 그 곳에 입술을 댔다. 


“뭐야.”

“그냥, 따가워 보여요.”

“안 따가워.”


가슴과 목에 키스한 석율은 위로 올라왔다. 입술을 가까이 한다.


“......꼴도 보기 싫은 거 아니었어?”

“맨날 맨날 그렇지 말입니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 안은 아주 뜨겁고 뜨거웠다. 냉방이 미치지 않아 습하도록 더운 비상계단에서, 석율은 더운 성준식의 몸을 안고 키스했다. 습해진 피부가 손 아래 달라붙었고 올라간 체온으로 담백한 체취가 풍겨왔다. 


“...대리님 집에 가도 돼요?”

“우리 집 에어컨 고장났는데.”

“저희 집으로 가시죠.”


준식은 1초만에 바뀌는 대답에 피식 웃었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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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율은 스트레이트 잔을 집어 한번에 다 들이켰다. 40도 가까이 되는 도수에 몸서리를 친 후, 다시 성준식을 향해 눈을 든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네가 모르는 걸 나한테 물으면 되나."


성준식은 과일안주를 씹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꽤 넓은 룸에 단 둘만 앉아 있었고, 석율은 조금 취해 있었다. 언젠가 일어났던 상황의 거울처럼, 혼자 마시던 한석율은 대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는 성준식을 전화로 불러냈다. 


한석율은 지난 주에 성준식에게 키스했다. 한 번은 실수로 치겠지만 두 번이나, 그것도 멀쩡한 정신으로.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석율의 마음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는 것 외에는.


"왜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내가 어떻길 바라는데."

"그러니까 당신은 왜...! 전, 지금."


준식은 잔을 천천히 비우고, 눈 앞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았다. 혼란을 느끼는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취기로 흐려져 있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건."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말을 이으려던 그는 불쑥 다가온 석율의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석율이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일어나 몸을 앞으로 기울였던 것이다. 혀가 꼬여 있었다.


"..않은 건...? 왜? 왜인데."

"좀 앉지?"


준식은 부담스러워서 몸을 뒤로 뺐다. 석율은 "이씨..."하고 중얼거리고 오른쪽 무릎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또라이같은 행동에 질겁한 준식은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쳤다. 


"야! 어딜 기어 올라와!"

"그러니까 왜애..."


뒤로 밀려난 석율은 말 끝을 길게 늘인 후 테이블에 팔을 괴고 고개를 숙였다. 술내음이 가득 묻은 숨을 몰아쉬고 다시 고개를 든다. 준식은 헤롱대는 꼬락서니를 짜증스럽게 보았다. 그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타입이었기에, 한석율의 멘탈 붕괴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게 저렇게까지 정신적 부침을 겪을 일인가 싶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넌 그게 그렇게 충격이냐?"

"이거는 말입니다, 제가. 제가...."

"아, 뭐어!"

"꼭...."


성준식은 도무지 나오지 않는 진심과 그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술주정이 지겨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석율을 밀치고 옆에 앉았다. 놀라거나 당황스러울 때 버릇으로 나오는 눈깜빡을 보며 입술을 마주대고, 곧이어 허둥대는 목을 안았다. 그는 빨아 당겼던 혀를 놓으며 물었다.


"꼭, 뭐?"


석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진짜 좋아하는 것 같잖아.’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고 젠장, 하고 자포자기식으로 중얼거린 석율은 준식을 마주 안았다. 옷깃 사이 쇄골로 더운 숨이 토해졌다. 한석율의 손은 성준식이 즐겨 매던 넥타이를 바닥에 떨궜다. 룸의 인조가죽소파가 준식의 맨 등 아래로 빠칙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깐 다녀온다더니 소식이 없어. 뭐래?”

“안 받는데? 회의 중이시랜다.”


‘회의 중입니다’라고 부재중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고, 성준은 기가 막히다는 듯 눈썹을 찌그러트렸다.


“이 시간에 회의중은 무슨... 튄 거 아니에요? 아 성대리님 진짜.”


벌겋게 취한 재훈이 불평을 했다. 모여서 술을 마시던 대리들은 모두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새로 온 실무직 여직원 나이 맞추기 내기에서 진 벌칙으로 성준식이 쏘기로 했던 술자리였다. 


“아~ 하여간. 잘 빠져나가.”

“얼마 나왔어?”


해준은 옆에 따로 놓여 있는 계산서를 집어들고 1/n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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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늦은 오전, 한석율은 복층 위 침대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원래 일찍 일어나는 체질이었지만 오늘은 가끔 문자나 메시지가 오는 진동이나 택배가 왔다는 인터폰이 올 때 말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만 쉬었다. 아래층에서는 의미 없이 켜 놓은 티비 소리가 울려퍼지고, 부엌에서는 냉장고 냉각기가 가동되는 소리가 울렸으며, 커피메이커는 피슉 하고 김이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개수대에서 물방울이 뚝 뚝 듣는다.


“으억!”


석율은 갑작스레 짜증 섞인 신음을 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라면 심상하게 넘어갈 듯한 소음들이 엄청나게 거슬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정지 상태로 둔 뇌리 속에 그 모든 소리가 망치로 때리듯 박혀 오는 것 같았다. 결국 복층에서 내려와 수도꼭지를 꽉 잠그고, 티비와 커피메이커를 끈다. 커피 한 잔을 따라 작은 소파에 앉고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후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말도 안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석율은 머그컵을 탁자에 내려놓고 대상조차 불분명한 분노를 터뜨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온통 헝클었다. 








넌, 날. 

그리고 행간에 생략된 ‘좋아해.’

그렇게 말하는 성준식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우위를 점한 사람 특유의 여유를 가지고 내려다보며 확신하듯이 심장 부근을 찌르는 손가락에 기가 막혔던 것도 잠시, 다음 순간 자신은 그에게 키스하지 않았던가.


“미쳤지. 미친거지 내가. 악! 내가!! 왜!!!!”


석율은 손에 머그를 든 채 좁은 오피스텔 안을 신경질적으로 왔다갔다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소파에 앉았다. 전화를 손에 든다. 연락처 스크롤을 쭉쭉 내려보았다. 


장그래, 안영이, 장백기. 그들에게 이 정도로 사적인 것을 얘기할 수는 없다. 대학교 때 동창들. 어떤 네트워크로든 정보가 공유되는 그들에게 직장 상사, 그것도 남자와의 곤란한 관계를 말하기는 좀 그랬다. 기나긴 연락처 목록이었지만 자신의 심정을 말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던 그는 문득 생각난 어플을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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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유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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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몇 살이야? 조건만남?

                      나: 아니. 얘기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


[상대방이 삭제한 유람선이에요]



“아... 냉정한 세상...”


석율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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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유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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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심심하다


                      나: 난 심란하다. 얘기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


두 번째 유람선에 대답을 보내자, 상대방은 의외로 순순히 답변을 보내 주었다. 


상대: 왜 심란?

나: 내가 미친 것 같아서.

상대: 왜

나: 회사에 진짜 재수없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석율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상대에게 답답한 속을 털어 놓았다. 상사인데 사람을 이용해 먹는다, 일도 떠넘기고 공은 가로채고, 별 거 아닌 일로 사람 엿 먹이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다며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손가락이 아프도록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문제의 ‘소시오패스’ 운운도 빼놓지 않았다. 상대는 고맙게도 짧게나마 맞장구까지 치며 읽어 주고 있었다. 


나: 그런데 키스했어. 그 사람은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데, 진짜 얼굴만 봐도 싫거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석율의 말에 상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말이 너무 많았나.’


[삭제된 유람선입니다] 멘트를 각오하면서 기다렸는데 답변이 왔다. 


상대: 그 사람 생각하면 심장이 막 뛰고 그래?

나: 얼굴만 봐도 울렁거려.

상대: 항상 신경 쓰이고?

나: 안 쓸 수가 없어. 이번엔 또 무슨 짓 하려나 싶어서.

상대: 늘 생각하고?

나: 그건 같이 많이 있고, 날 화나게 하니까.

상대: 좋아하는 거 맞네.


“뭐야!”


소리를 버럭 지른 석율은 폰을 소파에 던져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성거린 후, 인상을 쓰고 크게 한숨을 쉬며 폰을 집어든다. 


나: 바퀴벌레 봐도 심장이 뛰고 신경 쓰이는데 그것도 좋아하는 거야?

상대: 그 사람 쳐 죽이고 싶어?


“그건 아니지...” 


석율은 무심코 입 밖으로 대답을 했다. 성준식이 꼴보기 싫어 미칠 것 같으면서도, 정작 그가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맞아서 얼굴이 코피로 얼룩진 꼬라지를 보는 것은 달갑지 않고 불유쾌했으며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계단참에서 자신을 덮친 희한한 감정을 되새긴다.


나: 들어줘서 고마워.

상대: 어, 그게 얘기 끝이야?

나: ㅇㅇ 다른 얘기 할까?

상대: 아니 충분히 재밌었어. 


[상대방이 삭제한 유람선이에요]


착실하게 이야기를 잘 들어 주던 상대는 갑작스레 나가 버렸다. 석율은 홀로 남은 채팅창을 내려다보며 아까처럼 멍해졌다. 


‘좋아한다고...? 내가? 성준식을?’


망연자실하게 팔다리를 늘어뜨린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주말 내내 자신의 감정을 되새기고, 부인하고, 곱씹고, 결국 ‘난 매저키스트였나보다’ 라는 자포자기성 결론에 도달한 석율은 월요일 아침 기운 없이 출근을 했다. 언제나 일착으로 도착해서 숨을 돌리고 나면 이어서 성준식 대리가 “좋은 아침~”하고 늘 똑같은 인사를 날리며 출근을 한다. 석율은 버릇처럼 끄떡 목인사를 하고, 우울한 눈망울로 준식을 쳐다보았다. 


“한석율, 금요일에...”


코트를 벗으며 업무 이야기를 하던 준식은 시선을 눈치채고 그를 보았다. 


“왜?”


“....말도 안 돼....”


“뭐가?”


입 안으로 중얼거리고, 사수의 질문에 대답도 없이 건방지게 뒤돌아 탕비실로 가 버린다. 그런 태도에는 이미 질릴 대로 질린 준식은 크게 개의치 않고 코트를 벗어 걸고 노트북을 켰다. 






오랜만에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입사 동기 3명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한석율은 말도 없이 눈썹을 팔자로 내린 채 반복해서 한숨을 쉬고, 장백기는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며 눈동자를 굴렸으며, 안영이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냠냠 식사를 하다가도 이따금 석율을 보았다. 


“...하........죽고싶다 진짜.”


“또 성대리님 때문에요?


석율은 백기의 질문에 과도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 왜? 왜 물어?”


“아니, 보통 성대리님 때문에 괴로워하니까.”


백기의 대답에 길게 한숨을 쉬며 턱을 괸다. 영이는 야무지게 고기를 먹어치우고, 물을 마신 후 고개를 들었다. 


“혹시 랜덤채팅, 해봤어요?”


두 사람이 번갈아 한석율을 놀라게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석율은 그녀의 말에 또다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영이씨, 그건 왜?”


“아뇨.”


영이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젤리를 뜯어 맛있게 먹으며 지나가듯 말을 이었다. 


“그게 의외로 아는 사람 만날 확률이 높대요. 찾는 나이대랑 지역, 취향이 비슷하다보니.”


“영이씨 그런 것도 해요? 상상이 안 되는데.”


“주말에 심심할 땐 가끔 해요. 이상한 사람이 많아서 자주 안 하지만.”


백기와 영이의 대화를 들으며, 석율은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밥알을 내려다보며 굳어져 말이 없는 그에게 영이가 말을 걸었다.


“젤리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도 돼요?”


“.....예.....”


백기는 드물게 존대로 대답하는 석율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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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율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딱 봐도 티가 났다. 동공이 흔들리고, 엄지손톱을 무심결에 깨물고 있다. 손가락이 책상 위를 또닥거리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못하고 앞으로 숙여 앉은 채 몸을 흔든다. 그는 간헐적으로 성준식 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성준식은 다크써클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이 태연해 보였다. 그래서 한석율은 더 안절부절 못했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그는 성준식과 키스했다. 새벽까지 일하느라 무디어진 머릿속,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란 비현실적인 공간, 그리고 암암리에 자신이 품고 있었던 성준식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 합쳐져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이전에 몇 번 정도,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자신의 지긋지긋하고 이기적인 사수에게 느낀 적이 있었다. 자신이 밴드를 붙여 줄 때 눈을 감고 가만히 표정을 지웠던 고요한 얼굴에서, 불륜녀의 남편에게 맞고 얼굴에 말라붙은 코피를 바른 채 눈을 치켜뜨던 모습에서, 아이스크림을 혀 끝으로 핥으며 자신을 뻔히 보던 모습에서 한석율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었다. 

그랬기 때문에 준식이 먼저 석율을 끌어당겼을 때 그는 처음엔 놀랐으나, 곧 새벽시간다운 자제심 상실에 빠져 같이 응했던 것이다. 처음에 가볍게 와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그 다음은 석율 쪽에서 다가갔고, 젖은 소리가 날 정도로 서로 빼지도 않고 혀를 부비대고 입 안쪽을 핥았다. 키스만으로 서 버린 석율이 덤비려고 하자 준식은 고개를 젖혀 거부 의사를 표현하고,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아프게 푹 찔렀다. 


“가자.”

하고, 젖은 입술을 닦지도 않고 멀쩡한 얼굴로 말한 준식은 석율이 망연자실해하자 피곤하다고 성질을 부렸다. 회사에 뿌린 할인권으로 인근 사우나에 가서 자고, 일어나서 다시 출근하는 과정 내내 한석율은 정신을 못 차렸다. 자신 앞에서 그냥 옷을 벗고 알몸으로 씻으러 가던 성준식, 그리고 수면실에서 큰 타월을 덮는 성준식. 자신이 키스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사수는 너무도 태연하게 일상적인 과정들을 지나 잠이 들었고, 옆에서 옅게 숨을 쉬며 오르락 내리락하는 마른 등을 바라보며 한석율은 혼란에 빠져 꼬박 밤을 샜다. 






멍하니 성준식의 동그란 뒷통수를 훔쳐보던 석율은 사내 메신저가 오는 작은 소리에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이거 재편집해서 자료 열 부만 만들어.]

첨부파일이 와 있었다. 

[11시까지.]

답변을 보내야지. 석율은 손가락을 놀렸다. 

[왜 키스하셨습니까.]


보내고 나서 다시 들여다보니 알겠습니다-라고 치려던 의도와 다르게 무의식중에 본심을 쳐 놓은 것이 아닌가. 석율은 깜짝 놀라 정신이 확 들었다. 급히 뒤를 돌아본다. 성준식은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칫 하더니, 혀를 찼다. 

[15층 탕비실]

짧은 메시지가 오고, 성준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나간다. 석율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후, 잠깐의 시간 차이를 두고 그의 뒤를 따라 갔다. 








*

“너 미쳤어? 사내 메신저는 다 감시 가능한 거 알아, 몰라?”

“......왜 키스하셨습니까.”

“이게 귀가 막혔나.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왜 키스하셨냐고요.”


성준식은 눈을 굴렸다. 한석율의 표정은 고집스러웠고 눈은 불안했다. 한 번 꽂히면 앞뒤 안 보이는 한석율이라 더 말해도 소용 없을 것 같아, 그는 한숨을 쉬었다. 


“왜 했을 것 같은데?”

“......”

“생각해 봐.”

“모르겠습니다.”

“그럼 넌 왜 했는데?”

“제가 언제...!”


석율은 말을 중간에 삼켰다. 분명히 두 번째는 자기가 먼저 한 것이 맞았기 때문에.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성준식은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한석율의 양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저는.”

“넌?”


한석율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가 마음을 말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지겨워진 성준식은 커피를 탔다. 탕비실 벽에 등을 기댄 채 한 모금씩 마시며 석율을 쳐다본다. 


“모르겠습니다.”

“몰라?”


성준식은 한숨을 쉬고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그건, 네가.”

그는 한 걸음 다가가, 뒤로 물러나려는 석율의 왼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다시금 쿡 찔렀다. 


“날.”


그리고 자신을 가리킨다. 


한석율의 눈은 점점 커졌다. 경악으로 숨을 들이키며, 그 다음 말을 하려고 벌어지는 입술을 쳐다본다. 듣고 싶지 않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오려는 순간 그는 성준식의 가슴 께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지막히 이야기를 나누며 탕비실에 들어오던 두 사람은 눈 앞의 광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한석율이 옥상에서, 그리고 술자리에서 주먹을 쥐고 허공을 치면서 그토록 욕하던 자신의 사수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어깨를 잡고 몰두하듯 눈을 감은 채. 인기척에 실눈을 뜨고 그들을 본 준식이 손짓으로 까딱, 나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안영이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된 듯 굳어진 장백기의 소매를 뒤로 잡아 끌었다. 








*

안영이와 장백기는 타 팀 선배의 느닷없는 호출에 불려와 있었다. 성준식은 자료를 한 장씩 넘겨 보고 커피를 마시며, 시선도 주지 않고 물었다. 


“안영이씨, 장백기씨, 봤나?”

“그게 도대체...억!”


눈치없이 입을 열었던 장백기는 안영이의 팔꿈치에 명치를 강하게 찔렸다. 


“뭘 말씀이십니까.”

“탕비실에서, 봤냐고.”

“전 아무것도 못 봤는데요.”

“역시 그렇지? 장백기씨는..?”


기침을 하던 장백기는 성준식의 눈을 마주하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 영이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제서야 눈치를 챘다.


“저, 콜록, 저도 아무것도...”

“... 그럼 됐고. 가 봐.”


얌퉁머리없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상사에게, 영이는 어리벙벙하게 선 백기를 대신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잡은 채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꼼짝도 않는 한석율의 뒷모습을 곁눈질한 후, 상황 파악이 여전히 덜 된 백기를 지도하기 위해 그를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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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새벽 3시 55분. 전 회사에서 불이 켜져 있는 것은 16층, 그 중에서도 섬유팀 구역 뿐이었다. 푸른 형광등이 내리쬐어 한석율의 얼굴을 더 초췌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는 성준식 앞에 선 채 손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짜증을 숨기지도 않고 넘기던 준식은 피곤에 찌든 어두운 눈 밑을 부비고 종이뭉치를 다시 석율의 책상에 집어던졌다. 

“됐어, 이걸로 끝내.”

“...감사합니다.”

“아직도 이렇게 실수가 많은데. 이래놓고 입만 살았지.”

“.....”

자신의 실수 때문에 사수까지 밤을 새도록 만든 석율은 면목이 없어 평소와 달리 말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편, 준식은 일에 질려 길게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의자 뒤로 기댔다. 웬만하면 후배를 도와 줄 일은 만들지도, 또 하지도 않는 그였지만 사내 평판은 중요시했기에 자기가 연계되어 욕을 먹을 일에는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시간에 퇴근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 대한 고려는 없고 얄짤없이 9시전까지 출근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회사이다. 5시간 후면 다시 일을 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준식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부글부글 샘솟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사우나 가실래요.”

“후아...”


준식은 길게 하품을 하고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3시 56분. 사우나까지 한석율과 걸어가서 씻고, 자고, 속옷을 사고, 늘 가져다 놓는 여분 와이셔츠를 가져가 갈아입고. 모든 일이 한없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뒤로 기댄 채 대답 없이 눈을 감는 사수를 보고 석율은 안절부절 못했다. 평소 같으면 알 게 뭐냐고 생각할 석율이지만 오늘은 자기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 죄책감 때문에 눈치를 보게 되었다.


“커피 드릴까요.”

“밤 새란 거야?”

“그럼 가시죠.”

“귀찮아.”


그럼 뭐 어쩌라고. 새벽이라 자제심이 떨어진 석율은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을 누르지 못하고 또다시 준식이 질색하는 풍의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럼 뭐, 업어 드려요?”


준식은 그 말에 눈을 떴다. 이마에 주름을 잡고 석율을 노려본다. 자신이 남아서 무려 밤까지 새며 도와줬는데도 -물론, 석율이 과거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많이도 해 주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이기적인 그의 머릿속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후배의 태도에 옹심이 생겨났다.


“그래? 그럼 업어주든가”

“......”

“진짜 할 거 아니면서 말은 왜 꺼내.”


지겨운 새끼..라고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으려던 준식은 석율의 행동에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의자 앞으로 와 쭈그리고 앉아 등을 들이댄 것이었다. 


“업히시죠.”


석율은 오기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나오면 어쩔 건데? 하고 생각하던 그는 다음 순간 준식의 체온이 등 뒤에 가득 다가오고, 팔이 목을 뒤에서 안는 것에 움찔 놀랐다. 턱을 어깨 위에 얹는다. 준식의 숨결이 귀에 부딪히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뺨을 간지럽혔다. 석율은 당황해서 팔을 떨치고 몸을 일으켰다. 


“진짜 업히실 겁니까?”

“그러니까. 할 거 아니면 말을 꺼내지 말라고.”


허리에 손을 짚고 못마땅한 듯이 이야기한다. 눈을 깜빡거리던 석율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성준식이나 자신이나 참 도긴개긴이었다. 진짜로 등을 들이대는 걸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준식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석율은 준식이 마주 웃는 것을 보고 놀라 표정을 굳혔다. 서로 물 밑으로 갈굴 때 짓는 악의가 가득한 미소 말고 그가 자신에게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

“뭐?”

“그렇게 웃으시니까.”


경계심 없이 말하던 석율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그렇게 웃으니 ‘좋다’라고 말할 뻔 했다. 


‘좋기는. 미친...’


그는 자학하며 웃옷을 집어들었다. 버릇처럼 준식의 표까지 챙기고 고개를 들었으나 준식은 허리에 손을 짚은 그대로 미동 없이 앞에 서 있었다. 


“....?”


준식은 의아한 듯이 말가니 보는 검은 눈을 마주했다.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자신이 미소를 짓는 순간 석율의 얼굴에 처음 떠오른 것은 충격의 감정이었고 그 다음은 홍조였다. 계단 사건 이후 끊임없이 투닥대면서도 알게 모르게 석율에게 은밀한 심정적 연계를 느끼고, 이후 살피고 있었던 준식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석율아.”

“예....??!!”


목 뒤에 얹어 당기는 손에 끌려갔다. 석율은 커다래졌던 눈을 곧 감았다. 까슬한 성준식의 목 뒤에 그 역시 손을 가져다 댄다. 칼라 안쪽에 들어온 손 끝을 의식하며, 준식은 감겨진 얇은 눈꺼풀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새벽 4시. 본심이 튀어나오기 마련인 시간이었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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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율은 회식 자리에서 가장 막내였기 때문에 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타 팀과의 합동 회식은 거의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고, 술이 올라 다들 얼굴이 벌갰다. 그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냉큼 나가서 아이스크림을 인원수만큼 사 왔다. 모두에게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돌리고 난 석율은 맨 마지막 순서가 되어서야 성준식 옆으로 왔다. 여태까지 웃으며 나눠주던 표정을 굳히고 눈을 슬쩍 돌리며 말없이 내민다. 그냥 물 흐르듯 넘어가면 좋으련만, 성준식과는 대체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뭐야...? 왜 나만 이거냐?”

볼멘 목소리에 할 수 없이 눈을 들었던 석율은 당황하여 자세를 똑바로 했다. 분명히 다 같은 종류로 사 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남은 준식의 것만은 추억의 부모님용 팥 아이스크림인 비#빅이었다. 

“헉. 아, 그게... 죄송합니다.”

석율은 적당히 완충이 될 만한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았으나, 그들은 모두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자기들끼리 취해서 떠드느라 관심조차 없었다. 성준식은 현명하게도 웃는 표정은 유지하면서, 목소리만 작게 내어 석율을 갈궜다.

“너 나 맘에 안 들지?”

“예? 아니아니... 취해서.”

“아니아니이? 말이 짧다?”

“아뇨. 그게. 제 거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정확하게 준식의 열 받는 부분을 직격한 듯, 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필요 없어. 내가 지금 겨우 아이스크림 때문에 이래? 너 지금 나 열받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 어?”

“왜 그렇게 부정적이십니까? 실수라고요. 어쩌다 섞인 건데요.”

이 정도 갈굼은 많이 겪었기에, 석율은 곧 방어 태세를 취하며 준식 앞에 앉았다. 그와 비슷하게 표정을 평온하게 유지하며 입만으로 말대답을 한다. 

“며칠 전에 나 대신 출장 보내서 억하심정 있었던 거 아니냐?”

“아닌데요. 대리님이 찔리시는 거 아닙니까?”

“눈 안 깔아? 어디다 눈을 똑바로 뜨고 말대답이야.”

“눈 깔면 딴 데 본다고 뭐라고 하시잖아요.”

웃으면서 말이 오가는 것을 보고 착각한 문 과장이 환히 웃으며 그들이 있는 자리로 왔다. 

“아유~ 우리 성대리랑 한석율이는 무슨 얘기를 이렇게 정답게 하나?”

준식은 얼른 일어나 싹싹하게 술병을 집어들었다. 

“과장님, 여기.”

“아니, 내가 줘야지. 우리 성대리”

문과장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채로 어디에서 누가 입을 댔을지도 모를 정도로 돌고 돈 소줏잔을 준식에게 내밀었다. 준식은 그 잔을 받아 든 후, 문과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과장님, 우리 막내는 한 잔 안 주십니까.”

“줘야지 줘야지.”

준식은 문과장이 석율을 보는 틈을 타 재빨리 안에 든 소주를 앞에 놓인 찌개 그릇에 부어 버린 후, 잔을 석율에게 내밀었다. 석율은 입모양으로 ‘진짜 왜 그러십니까!’하고 절규했지만, 흐뭇한 눈으로 다 마실 때까지 바라보는 문과장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그 잔에 입을 대고야 말았다. 

“올해는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아, 둘이.”

“석율이가 워낙 잘 하잖습니까, 과장님. 예의도 바르고.”

뒷 말을 이 꽉 깨물고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만은 아니었다. 석율은 영혼 없이 웃은 후, 과장이 다른 자리로 가자 몸서리를 치며 물을 들이켰다. 

“아, 인간성 진짜.. 왜 그러세요?”

“인간성이래. 우리 석율이가 이렇게 예의가 발라요. 그리고, 너 너무 가식적인 거 아니냐? 과장님 앞에서는 웃으면서 마셔 놓고.”

“와! 방금! 쏟아버린 게 누군데!”

“내가 너랑 같아야겠어?”

“.......속 안 좋아.......”

“원래 위장에 헬리코박터파이로리 없으면 대한민국 직장인이 아니지.”

성준식은 얄밉게 대거리를 하고는 석율이 가지고 온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으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팥을 싫어했다. 

“네 거 내 놔.”

“아까 필요없으시다면서요.”

“필요해졌어.”

아오 시발... 석율은 감히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는 욕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몸에 밴 싹싹함으로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어 준식에게 내밀고, 대신 그의 것을 받았다. 

“안 먹냐? 녹는다.”

“저 팥 싫어하지 말입니다.”

석율의 대답에 준식은 기가 막힌 듯 파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못마땅하게 석율을 노려보며, 길고 둥근 하드 제형의 아이스크림을 혀 끝으로 핥았다. 석율은 갑자기 경직되었다. 얇고 매끈한 혀 끝이 아이스크림 겉을 핥아 올려, 좀 더 진한 침 자국을 내는 궤적을 따라서 눈이 간다. 그 행동과,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눈길이 더해지자 동성의 상사를 두고 상상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를 연상하고 만 석율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렇게가 어떻게인데.”

“.......”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상대 앞에서, 점점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자신에게 당황한 석율은 잠깐 자리를 피할까 고민했다. 다행히도, 준식이 뒤이어 와작 하는 소리를 내며 하드를 깨물어 잘라버리는 바람에 석율은 다시 진정하였다. 어딘가에 유사 통증을 느끼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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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율은 운전을 잘 하지 못했다. 면허 갱신을 하지 않아서 한참 손을 놓고 있다가 얼마 전 다시 발급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직속상사와 가는 출장길이 긴장될 만 한데, 불행히도 그 직속상사는 석율을 고깝게 여겼다. 석율은 일일드라마에 나오는 미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운전석에 타고 벨트를 채웠다. 당연히 조수석에 탈 줄 알았는데, 성준식은 당당히 뒷문을 열고 안쪽 자리에 탔다.

"저기....대리님?"

"어~썽율아, 왜?"

언뜻 다정히 대답하는 것 같지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때는 '또 뭘로 엿먹여줄까'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커피드십시오."

"우리 썽율이가 이제 좀 센스가 생겼네."

석율은 사 두었던 커피를 내밀고 나서, 흐린 눈으로 영혼 없이 예예 대답을 하고 시동을 걸었다. 회장님 모시는 기사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가장 조용히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얼마 전 거래처 여자 부장과의 불륜으로 전회사가 떠들썩하도록 창피를 당해 놓고도 성준식은 타고나길 얼굴가죽이 두꺼운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백밀러로 뒤에 앉은 준식을 본다. 까탈스러운 취향에 맞춰서 사 온 커피를 얌퉁머리없는 표정으로 마시며 자료를 넘겨보고 있다. 

'인간아...인간아...'

석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날 숙면을 취하지 못한데다, 긴장을 하고 있었던 탓인지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교통정체 없이 단조롭게 일직선으로 쭉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 엑셀을 밟고 있는 동안, 같은 길과 풍경이 반복되는 것에 살짝 트랜스상태같은 느낌을 받았던 석율은 뒤에서 퍽 차는 발길에 번뜩 눈을 떴다. 시속 140킬로였다. 

"속도 줄여! 내비 난리났잖아."

"죄송합니다."

석율은 눈을 깜빡이며 졸음을 쫓으려고 애를 썼다. 


"갓길에 차 좀 대 봐."

"왜요?"

"하라면 좀."

준식이 제일 싫어하는 두 글자가 '왜요'인데도, 하루에 한번씩은 입 밖에 꼭 내게 된다. 석율은 속으로 혀를 차며 시키는 대로 갓길에 차를 댔다. 준식은 밖으로 나와 석율 쪽 문을 다짜고짜 열었다. 

"야, 내려."

"...왜요?"

".......그놈의 왜요 진짜."

이를 꽉 다물고 내보이는 표정을 보니 빡친 것 같았다. 석율은 한숨을 쉬고 벨트를 풀었다. 이 인간이 또 뭘로 갈구려나 싶었다. 몹시 피곤해진 그는 고분고분 잔소리를 듣고 말리라 생각하며 나와 서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떨구는, 학생 때 교무실에서 잘 써먹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성준식은 석율을 내버려 둔 채 운전석에 타고 문을 탕 닫았다. 깜짝 놀란 석율은 허둥지둥 반대편으로 돌아가 조수석의 문을 열고 탔다.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준식을 본다. 

"누가 쫓아와?"

"아뇨. 저 길바닥에 내버리고 가시는 줄 알고."

성준식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넌 내가 그렇게 나쁜 놈으로 보이냐?"

"......."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언의 긍정이란 뜻이었다. 기가 막혀 버린 준식은 석율을 뻔히 보았으나, 그는 눈알을 굴려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준식은 헛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돌려 뒷자리에서 자신이 들여다보던 자료를 집었다. 석율의 무릎 위에 던져 주고, 자신이 마시던 커피를 내민다. 

"브리핑은 네가 좀 해라."

"어젯밤에 다 봤습니다."

"또 봐."

석율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마주보았으나, 곧 자료를 집어들었다. 준식은 벨트를 채웠다. 

"대리님이 운전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가 운전을 너무 못 하니까. 불안해서 타겠어?"

연습하겠다면서 형식적으로 사과하는 말을 귓전에 흘려듣는다. 준식은 손에 익은 듯 편하게 운전을 하며, 자신이 입을 대고 마시던 커피 컵 리드 위에 자각도 없이 입을 대고 마시는 석율을 곁눈으로 보았다. 자료를 한장 한장 넘기며 다시 보던 석율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왜 보세요?"

"왜 되게 좋아하네. 철학과를 갔어야지, 한석율."

빈정거리는 말에 부루퉁하게 고개를 숙인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석율은 고개를 들어 준식의 뺨에 남은 자국을 보았다. 예전에 양다리 걸치다가 여친한테 걸려 장미꽃다발로 쳐맞고 나서, 장미가시에 긁힌 상처가 희미한 흉터로 남아 있다. 


"넌 왜 봐?"

"뺨에 흉터 남았네요."

"네가 장미로 사 와서 그래."

".....남 탓 올림픽 있으면 금메달 따실 텐데..."

"지금 뭐라 그랬어?"

"아닙니다."


석율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준식은 단조롭게 펼쳐지는 창 밖 풍경을 직시하면서, 하란다고 또 성실하게 자료를 다시 한 줄 한 줄 훑어보는 석율을 이따금 훔쳐 보았다. 졸음을 쫓기 위해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시는 색이 진한 그의 입술이 컵 리드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결국은 자신이 까탈스럽게 고르는 취향대로 커피를 사 오거나, 얼굴의 상처에 폼을 붙여 주거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홀로 찾아와 말없이 앞에 서 있어 주었던 이 후배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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