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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어두운 무대 위, 단 하나의 조명이 의자에 앉은 석율을 비춘다. 얼굴에 강한 음영이 진다. 고개를 서서히 들고 관객을 보는 석율, 무표정한 얼굴에 갑작스레 과한 미소를 지어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석율: 들었지, 자기들. 난 지금 심각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이름? 글쎄,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정신적인! 알레르기 질환이랄까. , 그 말이 딱 맞아, 정신적인-알레르기.

 

무대 왼쪽에 조명이 들어온다. 성준식이 편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본다.

 

준식: (설명을 책 읽는 말투로 낭독) ~ 알레르기란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만 두드러기, 가려움, 콧물, 기침 등의 이상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며) 이거지. 보통 사람들은 넘어가는 것들을 우리 부사수만은! 넘어가질 못해. 과민반응. ?

 

석율: (일어나서 준식 쪽을 바라보며) 왜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 보통 사람들이랑 절 다르게 대하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준식: 난 늘 같은데?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나한테 남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는 건 너야. (관객을 바라보며) 사람이란 사실 흐릿한 존재일지도 몰라. 타인이 긋는 선이 날 정의해 주지. 나는 그저 나인데, 누구한텐 친근한 사람인 반면 누구한텐 천하에 나쁜 놈으로 그려져.

 

석율: 늘 같다구요? 전혀 다른데요, 그 누구들과 달리 전 수단이잖습니까, 이용하기 쉬운 셔틀...

 

준식: 그런 쪽의 일관성 말고.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내 아래에 있으면 그렇게 대할 거야. 이런 쪽으로 같단 얘기지. 넌 나에게서 특별한 대우를 바라고 있어. 바라는 게 있으니까 그냥 못 넘기는 거고.

 

석율: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당연한 걸 원했을 뿐입니다. 이끌어주고 서포트해주는 관계요. 김대리님과 장그래같은 관계 말입니다.

 

준식: (웃음을 터뜨리며) 하이고, 김대리? 걔 그러는 거 자아도취야.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석율아, 여긴 말이야. 우리가 몸담은 곳은.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니 인간관계에 마음을 많이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 덧없어. 난 널 이용하고, 너도 주변머리가 있다면 날...

 

석율: ! 그만 두십쇼. 성대리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힘이 빠져요. 의욕이 없어져서 살기 싫어진다구요.

 

석율, 의자에 걸쳐진 윗옷을 벗겨 팔에 걸치고 퇴장한다.

 

준식: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빈정거리듯) 참 귀여워, ?

 

준식,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정자세를 취한 후 사원증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앞을 주시한다.

준식; 나도 저랬었던가? (낮은 목소리로) 기억이 나지 않아. 사회에 뛰어들고 나서는 자잘한 감정에 대한 기억들이 흐려졌어.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차를 타고 달리는 것처럼 눈에 들어오는 게 달라졌어. 내 주변은 그저 흘러가는 풍경일 뿐이야. 흐름, 가야 할 발걸음, 쓸만한 것과 버려야 할 것들.

 

불이 꺼진다.

 

S#2

석율이 무대 오른편 원탁 위에 앉아 의자에 앉은 동기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무대 왼편 책상 앞에 준식이 앉아 서류를 넘겨보며 집중하고 있다.

 

석율: (방백) 감정은 기울기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어. (동기들에게) 그래서 성대리님이..

그래: 그래서 성대리님이.

백기: 또 성대리님이?

석율: (방백) 고장났다는 건 알지만 걷잡을 순 없어. (준식 쪽을 보며) 고작해야 대리인데 강하면 얼마나 강해서!

영이: 강하죠, 한석율씨보다는.

그래: 이길 수 없을 땐 시간을 두고.

백기: 아니, 꼭 이겨야 합니까?

석율: 기면 기고!

그래: 아니면 아니라구요? 흑백은 바둑에서나 갈리는 거죠.

 

동기들 자기 물건 챙겨 일어나서 퇴장, 석율은 원탁에서 뛰어내려 불안하게 서성댄다. 준식 뒤에까지 다가갔다가 물러나고, 무대 위를 배회하며 손톱을 씹는다.

 

석율: 과하게 의식하고, 필요 이상으로 살피고 집중하고, 별 말도 아닌 것에 의미부여하고자기 방어를 위해 작동해야 할 시스템이 스스로를 파먹는 알레르기. 머릿속은 어느 새 저 사람으로 가득 찼어. 한순간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바라보게 돼.

 

준식: (화면을 보며) 치료법은 회피. 항원과 최대한 접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이다. (의자를 석율 쪽으로 돌리며) 저런, 회사 생활에서 그게 되나.

석율: (다가서며) 불치병이네요.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방백) 의식해버리고 나면 마음은 평정을 잃고 정신없이 기울어. 그래서 나비날개짓 정도 되는 작은 액션도 폭풍우가 되서 날! 후려쳐!!

 

두 사람을 비추는 조명만 남기고 암전.

 

석율: 지금 한 말씀은 무슨 의미십니까. 공격입니까? (찌푸리며 돌려 앉으려는 의자를 다시 돌려 자신을 보게 하며) 아니면 제 과민반응인가요.

준식: 숨 못 쉴 때부터 강박적인 거 알아 봤다.

석율: (방백) 흐려지는 판단.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에서부터 모든 불안은 시작된다. 그럼 세상이 불안하게 흔들리게 돼. 그래서 불안해진 사람은 곧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허리를 굽히고 준식의 의자 팔걸이에 두 손을 올려 기대며) 일부러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미우신 것 아닙니까. 절 매장시키시려고...!

준식: 글쎄, 어떻게 생각해? 웃는 얼굴, 다정한 말투 속에서 본심을 찾아 봐.

석율: 미쳐버리겠네.

준식: 치료법 중엔 면역 요법도 있어. 항원에 익숙해져서 과민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환상을 버려. 패턴을 봐. 난 너에게만 특별대우하지 않아. 한결같지. 달면 삼키고, 쓰면.

 

준식은 바퀴 의자를 뒤로 빼고, 손을 짚었던 석율은 휘청거린다. 준식은 원래대로 일에 집중한다.

 

석율: 이상하네.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고개를 들며) 면역이상이 아니라, 과민반응이 아니라, 정말 유해한 물질이라 모든 반응이 유의미한 편이 차라리 낫겠어. 성대리님.

준식: 석율아~ 커피.

석율: 성대리님. 저 보세요.

준식: , 또 왜.

석율: 절 미워하십니까.

준식: 아오!!!

 

불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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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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