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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전력 60분 2015. 9. 18. 16:28

일을 다 끝내고 상큼하게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 한석율은 제 책상 앞에 선 채 멍해졌다. 분명히 평지였는데 자리를 비운 사이 서류철 더미가 층층이 쌓여 탑이 생겨 있었다. 서류철마다 지시사항이 노란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제 사수 성준식의 깔끔한 글씨체였다. 그는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몸을 돌려 준식을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짱한 얼굴로 볼펜 꼭지를 입에 대고 눈을 깜빡거리며,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성대리님.”

?”

이걸, 다요?”

~”

베트남 공장 시찰 건은 성대리님이.”

한석율씨.”

 

준식은 석율의 말허리를 뎅강 잘랐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검고 동그란 눈동자를 위로 굴려 빤히 쳐다본다.

 

.”

 

석율은 입술을 꾹 누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당한 업무 분배에 항의할 온갖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성준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 커피 한 잔만. 갈증나네?”

 

였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석율은 얌전히 앞으로 모두었던 손을 허리에 올렸다. 그가 그 자세를 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술을 조금 내미는 것은 지금부터 따지겠다라는 신체 신호였으므로, 성준식은 재빨리 한 번 더 선수를 쳤다.

 

오늘은 달달하게. 나 당 떨어졌다 썽뉼아.”

 

그리고선 쌕 웃는 얼굴은, 어이없게도 석율의 눈에 귀엽게 보였다. 그래, 좋아하는 쪽이 병신이지. 이렇게 이용당하고도 좋아하는 내가 호구지. 투덜거리면서 탕비실로 간 석율은 커피믹스도 원두커피도 싹 다 떨어진 것을 보고 더 성질이 났다.

 

다 먹었으면 좀! 채워놓든가, !”

 

탕비실 물품은 원래 총무과에서 일괄 지급하지만, 중간에 다 떨어졌을 경우 가지러 가는 일은 그 책임소재가 불분명했다. 화장실 휴지의 법칙처럼 마지막 쓴 사람이 채워놓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귀찮기 때문에 대부분 은근슬쩍 마지막 물품을 사용만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석율 역시 가지러 가기가 귀찮아서, 아래쪽 수납함을 열고 인스턴트 커피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바람에 오래돼서 좀 굳어진 크리머, 그리고 역시 오래되어 종이 포장이 노랗게 변해가는 각설탕을 끄집어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다 봐주고, 다 해주고, 그래야 하나? ?”

 

영감처럼 혼잣말로 불평하며 각설탕을 컵 안에 한 개 퐁 빠뜨리고, 서서히 녹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점점 짜증이 났다.

 

안 참아, 아니, 못 참아! 가만 안 둬.”

 

그는 팔짱을 끼고 가만 안 둘 방법을 곰곰 생각했지만 팀 막내에다 평사원 나부랭이에게 사수를 응징할 별다른 수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각설탕 껍데기를 한 개 더 벗겨 넣고, 녹는 걸 보던 석율은 눈을 반짝 뜨곤 또 한 개, 또다시 한 개를 까서 넣었다.

 

당 떨어지셨다구요? 슈가쇼크나 겪어 보시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개 더 빠뜨리고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

 

그래서 각설탕 5개 넣었는데 말이지~ 커피 맛 잘 아는 척 하더니 잘만 먹어. 입맛이 애야 애.”

 

영이는 휴게실 녹색 의자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석율을 보았다. 그는 책상에 걸터 앉은 채 손짓을 해 가며 종알종알 제 사수 뒷담화를 해 대느라 뺨까지 발그레해져 있었다.

 

그럼, 특집 난 상사한테 여기까지 해 봤다’, 이제 영이씨 차례.”

전 없어요.”

“...? 잠깐만.”

저도 없습니다.”

 

나란히 앉아 있던 백기가 일어나며 덧붙였다.

 

뭐야, 이러기야영이씨? 한 개씩 말해보자며!”

 

웃음을 간신히 참은 영이는 황망한 표정의 석율에게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한석율씨,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네요. 상사한테 당뇨병 병인이나 제공하고.”

? 아니 영이씨! 영이씨가 더 무섭...! , 백기씨, 이런 거 뭐라 그러지?”

보통 경박하다고 하죠.”

, 그거 말고. 뒷통수... 잠깐. 경박? 장백기씨까지 이러기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두 사람은 걸음걸이도 단정하게 또박또박 가 버리고 말았다. 혼자 남겨진 석율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분통을 터뜨리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 ! ~ 이 사회가 이렇게 무서워.”

그럼, 무섭지. 어디서 누가 들을지 모르거든.”

 

뒤에서 선명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석율은 등 가운데서부터 목 뒤까지 서늘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안절부절 몸뚱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동안 발걸음은 토박토박 석율의 뒤를 스쳐 앞에 와서 섰다.

 

"그래~ 우리 썽뉼이가 사수 맛있게 먹으라고 각설탕도 다섯 개나 넣어주고. 그렇구나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두 사람은 서로의 양상에 대해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성준식이 과하게 다정하게 말하는 것은 공격신호였다. 석율은 할 말이 없어 바닥을 보았다. 숨 막히는 침묵의 몇 초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준식이었다.

 

"썽뉼아?“

", , 대리님...“

"커피 한 잔 타 와 봐. 몸에 좋게.“

"."

 

그 자리를 벗어날 일념만으로 경보 수준으로 걸어나온 석율은 제 부서로 얼른 올라가 탕비실로 들어갔다.

 

아오. 시발. 있으면 티를 좀 내든가.’

 

본인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휴게실에서 흥분하여 크게 떠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성준식을 원망하던 석율은 손을 멈추고 검은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

 

성준식은 제 책상 위에 놓이는 컵을 집었다. 천천히 들어올려 입술에 가져가며 곁눈으로 석율의 반응을 살핀다. 손을 꾹 쥐었다 폈다가, 눈동자가 흔들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바운더리 안에 든 사람에게 해 끼치는 것에는 죄책감이 강한 한석율이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얼굴에 매우 티가 난다. 그가 모른 척 입술을 대자, 결국 석율은 참지 못하고 컵을 빼앗아 갔다.

 

?”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석율은 질책하듯 가늘게 뜨고 보는 눈을 피해 황급히 윗옷을 집어 들고 나왔다. 발끈해서 커피에 침을 뱉으며 몸에 나쁠 거 없잖아, 그냥 아밀라아젠데.’라고 합리화했지만 결국 셀프 설득은 실패였다. 그는 성준식이 선호하는 캬라멜 마키아또를 잽싸게 사 와서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 결재를 기다리듯 손을 공손히 모으고 앞에 선다.

 

너 먼저 마셔봐.”

 

준식의 목소리에는 이미 의심이 꽉 차 있었다. 석율은 쭈뼛쭈뼛 리드를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액체가 목구멍까지 꼴깍 넘어가는 걸 관찰하고 나서야, 준식은 커피를 받아 마셨다. 석율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매우 불편하게 자리에 앉아, 이등병처럼 정자세로 일을 재개했다. 몇 분 후, 평온한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불렀다.

 

한석율씨. 내일은 자바칩 프라푸치노.”

예이...”

 

석율은 지은 죄가 있어 반항도 못 하고 대답했다.

 

*

 

요즈음 일은 계속 바빴다. 섬유팀이 관리하던 공장 중 일부는 대서양 물산과의 합작 법인 설립과 함께 그쪽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 날도 야근 확정이었고, 문과장은 윗선과 회식을 빙자한 회의를 가고 없었다. 석율은 피곤에 찌든 채 기지개를 켜다가, 성준식과 눈이 마주치고 얼른 손을 내렸다. 오전에 자신의 행동을 들킨 후 그는 아직까지 준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피곤해?”

, 아닙니다.”

피곤하잖아. 커피 한 잔 타줄까?”

????”

 

석율은 그의 말에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아프세요?”

, 넌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싫음 말고.”

그게 아니라, , 좋은데.”

 

석율이 말 끝을 흐리자 준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사라졌고, 잠시 후 커피잔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

 

석율은 코 밑에 디밀어진 종이컵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복수? 비꼼? 확률은 낮지만 순수한 호의? 뭔지 판단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자 준식은 짜증을 냈다.

 

안 받아?”

 

손에 쥐어 주고 자리에 앉는다. 석율은 종이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지만, 곧 뗐다. 자신이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곁눈으로 보고 있는 게 수상했다.

 

“...솔직히 말해 보십쇼. 대리님, 여기 뭐 넣으셨죠.”

, . 내가 너야? 말 하는 거 보니 아까 뭐 넣었었구만. 어쩐지.”

.....그게.”

그런 짓 안 하니까 마셔, 마셔.”

 

손짓을 까딱 하며 마시라고 종용한다. 석율은 할 수 없이 컵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시며, 컵 너머로 눈을 굴려 준식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안 넣었는데도, 맛있지?”

“.....예에....”

 

찝찝하게 대답하느라 어두워진 표정을 관찰하던 준식은 낄낄 숨을 들이마시며 웃음을 터트렸다.

 

당최 못 숨겨. 멀었어, 한석율.”

왜 웃어요! 역시 침 뱉으셨죠?

뭐하러?”

 

준식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석율의 멱살을 잡아 끌었다. 커피로 쓴 맛이 나고 촉촉해진 석율의 혀는 준식의 혀와 엉켰다. 매끄럽게, 표피가 아닌 안쪽부터 오싹하는 근질거림이 밀려 올라와 코로 단 숨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서로 다 왔다 갔다 했잖아.”

 

석율의 입 안에서 혀를 빼내고, 입술을 적시며 말한다. 석율은 입 안에 고인 액체를 목 안으로 넘기고, 얄밉게 웃는 보조개진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다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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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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